#15. 그런 내 마음을 너는 어떻게 알고.
가끔 물어야 하는 안부가 있다.
갈 곳이 있다며 친구는 이른 아침부터 나를 불러냈다. 어디로 가느냐고 몇 번이나 물었지만 가보면 안다고, 일단 차부터 타보라 했다. 주말이니 근처에 영화나 보러 가려나보다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친구 차를 탔는데, 삼십 분이 지나도 목적지는 나오지 않았다. 대체 어딜 가려나 슬슬 물어보려는데, 그는 고속도로를 탔다. 세상에,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이렇게 나는 납치를 당하는가 싶었는데, 친구는 자꾸 자기만 믿어보라 했다. 아니, 내가 널 뭘 믿고.
두 시간이 지나도 목적지는 나오지 않았고, 슬슬 목이 아프고 허리도 뻐근했다. 휴게소에서 그저 그런 늦은 점심을 먹었다. 한 시간만 더 가면 된다는 말에 이걸 한 대 쥐어박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도착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때 마음껏 화내라고 해서 딱 한 시간만 더 참아보기로 했다. 가는 만큼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에 좀 짜증도 났지만, 자신을 한 번만 믿어보라는 오래된 친구의 말에 차마 신경질을 부릴 순 없었다. 그렇게 나는 오랜만에 바다와 닿았다.
바다를 보는 순간, 차 속에서 쌓였던 짜증이 한꺼번에 소멸됐다. 당일치기로 강릉이라니. 친구가 잠시 미친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런 생각은 잠시 접어 두었다.
늦가을의 강릉 바다에는 시린 바람이 불었다. 얇은 살얼음 같은 바람이 나를 투과하는 듯했다. 바람의 한 조각이 된 듯 스스로가 투명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바다를 향해 뛰었다. 머리칼이 깃발처럼 펄럭였고, 발은 모래사장에 푹푹 빠졌다. 이러니 여기가 다 우리 땅 같았다. 찬 바람에 볼은 금세 빨개졌다. 바다는 나를 들뜨게 했다.
우리는 파도에 누가 더 가까이 가는지 내기를 걸었다. 집채만 한 겨울 파도가 저 멀리서부터 무섭게 달려오는데도, 우리는 카메라를 모래사장에 세워두곤 바다를 향해 뛰어 발자국을 찍었다. 파도를 등지고 도망치는 모습이 아주 우습게 비디오에 담겨, 돌려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 덕분에 머리는 어느 때보다 맑았다. 찬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해변을 걸었다. 친구가 말했다.
“나는 부서지는 파도를 보고 있는 게 좋아.”
“왜?”
“내가 가진 문제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거든.”
친구의 말이 바다 앞에 서면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좋다’는 말처럼 들렸다. 말은 다르지만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랬다. 바다 앞에만 서면 마치 내가 가진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끝없이 밀려와서는 또 끝없이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마치 전능한 존재 앞에 서 있는 것 같단 생각도 했다. 엉켜있던 내 속의 고민들이 숨을 곳 없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는 듯했다. 덜 힘들어해도 되는데 더 힘들어한 문제들, 더 힘들어야 했는데 덜 힘들어 한 문제들이 깨달음을 얻고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초겨울 바람을 업고 큰 모양으로 몰아치는 파도를 보며 두려우면서도 좋았고, 아름다우면서 아찔했다. 두 가지 감정이 출렁이는 폭이 커서였을까. 도시에 살며 크고 작게 앓을 때마다 바다가 떠올랐다. 바다는 거대하니까. 그러니까 여기에 작은 시름을 두고 가도 괜찮지 않을까. 바다 앞에서만큼은 마음껏 소리쳐도 되지 않을까. 그러면 이상하게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빠져나간 만큼 바로 채워지는 파도를 보며, 내게서 빠져나가 나를 슬프게 한 빈자리에 금세 새롭게 무언가 채워질 거라는 이상한 믿음도 들었다.
그런 내 마음을 너는 어떻게 알고.
친구는 며칠 전 '가고 싶었던 회사에서 떨어졌다'는 내 말이 계속 맴돌았다고 했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떨어졌었는데, 그 날은 지금까지 와 조금 다른 것 같았다고. 이 먼 곳까지 나를 납치한 이유를 이제야 털어놓다니. 미워하려다 미워할 수 없었다. 변명치곤 너무 따듯했으니까. 작은 웃음이 지어졌다. 친구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고맙다는 말은 밀려나가는 파도에 실어 보냈다. 말하지 않았지만, 너는 내 말을 들은 듯했다.
나도 몰랐던 나의 안부를 물어준 사람과 함께 바라본 늦가을의 바다.
힘들었지만 아주 깊이 내 속에 남을 것 같던, 늦가을이었다.
* 100일 매일 쓰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해당 원고는 초고입니다:)
청민 Chung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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