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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민 Sep 22. 2020

씨앗 연필

#22. 누군가의 일상을 가득 채운 눈부신 문장들을 마주하며


친한 동생이 사무실을 옮겼다고 해서, 고향에 내려간 김에 짬을 내어 동생의 새로운 가죽 공방을 찾았다. 예전 공방은 지하상가에 있어 그림자가 더 많은 곳이었는데, 새로운 공방에는 생명력을 가득 품은 햇빛이 잔뜩 들었다. 옆 가게가 리모델링을 한다고 공사 지지대가 입구를 살짝 가렸다만, 햇빛은 지지대를 넘어 동생의 공방을 충만히 채웠다. 오랜만에 찾은 동생의 공방. 한눈에 봐도 예전보다 신제품 수가 늘었다. 오, 신제품들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하나하나 살피다가, 시선이 한 곳에 머물렀다. 출입구 옆에 세워진 화분이었다.



세상에. 어쩜 이렇게 화분을 잘 키웠어? 요즘 식물에 관심이 생겨 집에서 바질을 키우고 싶은데, 우리집만 오면 화분이 시들시들해져 나름의 꿀팁을 물으려고 파릇파릇한 동생의 화분을 살폈다. 그러다가 발견하게 된, 씨앗 연필.


"어머, 이 책 봤어? 연필 여기 꼽아 뒀네."

"네, 언니. 저 그 책 왕왕 울면서 봤잖아요. 문장 문장이 다 좋았어요. 밑줄 긋고 인덱스 붙여가며 꼼꼼하게 읽었다니까요? 연필이 꽂혀있는 그 화분. 씨앗연필 뒤에 달린 씨앗으로 제가 물 주며 이만큼 키운 거예요."


화분에 꽂힌 씨앗 연필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담당이었던 도서의 사은품이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작은 씨앗을 이만큼 키웠다니. 세상에. 그것도 이렇게 큰 화분으로. 대체 어떤 노하우가 있었던 거야? 놀라움 반 뭉클함 반으로 화분을 살폈다. 씨앗 모습만 봐서 그런가, 씨앗 연필로 정말 잎을 내는구나 하는 멍청한 생각을 하며 계속 감탄했다. 동생은 이 책을 읽으며 '왕왕' 울었다고 했다. 그 책은 삶이 힘들어도 희망으로 삶을 꽃피우자는 멋진 메시지를 담은 책이었다. 모든 구절구절이 다 좋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뭉클하고 감사하면서도 선뜻 좋아만 하기엔 망설여졌다.



동생의 가죽 공방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모니터를 보며 책을 위한 일을 한다. 2년 차 마케터가 되니 어떤 부분은 익숙해지고, 또 어떤 부분은 능숙해졌다. 도서는 매주 새롭게 탄생했고 나는 매일같이 책의 시작을 목격하는 사람이었기에, 모든 것에 찌릿하던 예전과는 달리 요즘은 일정한 주기로 패턴화 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런데 '왕왕 울었다'니.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는 기분이 들었다. '아!' 하는 아찔한 느낌이 번쩍 들었다. 내겐 매일 보는 사은품일 뿐이었는데, 책 너머의 누군가에겐 삶의 흔드는 강력한 희망이었다니. 멜랑꼴리 한 기분에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많은 책들이 매달 쏟아지는 일상에서, 때론 조금 빨리 내 손에서 떠나버리는 책들이 있다. 분명 최선을 다 했지만, 아쉬움을 간직하게 되는 순간들. 그런 내게 동생의 반응은 숨어 있던 내 모든 감각을 깨우는 듯했다. 아쉽게 떠나갔던 어느 책이 누군가의 일상에서 아주 중요한 경험이 되는 순간을 마주하며, 내 속의 아쉬움은 뭉클함으로 다가왔다. '너무 좋았다'는 동생의 말은 내 속의 열정을 다시금 간지럽혔다.


화분 앞에서 나눈 우리의 대화는 생명력 가득한 햇살을 잔뜩 머금고 피어난 씨앗 같았다. 대화와 함께 내 속에서도 무엇인가 옅은 흙을 뚫고 나오는 듯 했다. 능숙한 마케터가 되더라도 익숙함에 무뎌지는 마케터는 되지 말아야지. 누군가의 일상을 가득 채운 눈부신 문장들을 마주하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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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민│淸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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