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일터에서 찾은 세 가지 소소한 기쁨
"출판사에서 일하고요, 마케터입니다."
공식적인 소개가 필요할 때 이름 뒤에 문패처럼 직업을 붙여 말한다. 그럼 사람들은 신기한 듯 나를 바라봤다. 마치 예전의 나처럼.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책은 거대하고 단단한 존재로 남아있기 때문인 걸까. 신기한 시선 이후엔 보통 질문이 따라왔다. 출판사에선 무슨 일을 하는지, 책은 어떻게 마케팅을 하는지. 자기소개를 하면 막상 출판사 직원끼리는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질문으로서 자유로운 직업 마케터와 보수적일 것 같은 출판의 조합에 묘한 신비함을 표현하곤 했다.
2년쯤 같은 일을 하니 알게 되었다. 일이란 큰 범위의 원들이 비슷한 형태로 어떤 주기대로 흘러가는 거라고. 뉴스에서 매년 기록적인 더위와 폭우, 5년마다 대통령 선거에 대해 이야기하듯이, 나의 업무도 도서 배본이란 주기로 비슷한 모양으로 굴렀다. 덕분에 어제보단 오늘 더 능숙해졌고 작년보단 올해 더 나은 사원이 되었지만,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일터에서 맞는 작은 기쁨들. 일정한 주기로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먹고사는 생계의 사이클에서도 크고 작은 기쁨들이 있었고, 그렇게 수집한 나만의 기쁨들은 일정한 주기가 지나도 어김없이 좋은 순간으로 내 속에 쌓였다. 오직 출판사에서 일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소소한 기쁨들은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확실한 행복을 주었달까.
기쁨, 하나.
'책 왔습니다'하는 목소리와 함께 새로운 책들을 처음 만난다. 위아래가 상하지 않도록 종이를 덧대고, 노끈으로 단단하게 포장되어 도착한 책들. 탯줄을 자르듯 노끈을 가위로 자른다. 빳빳한 노끈끼리는 반듯이 돌돌 말아 매듭을 지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휴지통에서 튕겨 나오니까.
갓 입고된 책에는 갓 구운 빵처럼 따끈따끈한 온기가 남아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세상에 없었고, 오직 문장의 형태로만 존재하던 것이, 오늘은 물성을 갖춘 하나의 책으로 온기를 가지다니. 책 표지에 손을 잠시 올려두고 온기를 느껴 본다. 마치 아이가 숨을 쉬듯이, 숨결을 가지고 태어난 책. 나는 그 온기가 따듯하고 따듯해서, 바쁜 와중에도 잠시 멈춰서 책의 온기를 느끼곤 했다.
마케터의 일은 책이 배본된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사전에 미리 세팅해야 하는 부분도 있지만, 책이 입고가 되면 제대로 달리기를 시작한다. 세상이란 어차피 내 마음대로 되지 않게끔 초기 설정이 되어 있고, 나는 자주 좌절할 수밖엔 없도록 세팅 되어 있지만, 그럴 때도 책의 온기를 떠올리며 잠시 마음을 달래곤 했다.
기쁨, 둘.
좋아하는 일이 먹고사는 일이 되니, 집에 돌아와선 책을 잘 읽지 않기 시작했다. 뭔가 업무의 연장인 것 같아서. 집에선 주로 맛있는 식탁을 차려서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며 먹는 걸로 퇴근 후 시간을 보내곤 한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책 이제 징글징글하다'라고 말하는 뻔한 직장인이 되었지만... 그런 나도 어쩔 수 없나 보다.
좋은 책을 만나면 그렇게 가슴이 뛴다. 특히 회사에서 마음에 쏙 드는 책이 나올 때면, 가슴이 벅차 집까지 책을 가지고 와서 읽는다. 몇 번은 새벽 늦게까지 읽다가 침대에서 책과 함께 잠든 날이 있다. 또 좋은 책을 만날 때면 기쁨을 넘어 뿌듯해진다. 이렇게 멋진 책을 출판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는 것도, 좋은 원고를 책으로 만든 편집자님의 눈 밝은 안목에 대해.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사비로 우리 회사 책을 구입해 주변에 선물하기도 한다. 먹고사는 직장인의 사이클 속에서 좋아하는 마음을 가장 먼저 포기했다고 생각한 날이 많았지만, 좋아하는 걸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지는 하루도 있다.
기쁨, 셋.
담당 도서가 정해지면 마케팅 계획안을 먼저 작성한다. 관련 시장을 파악하고, 앞으로 진행할 일들을 먼저 살펴보고 기획하는 일. 맡고 있는 모든 업무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자, 여전히 계속 어려워하는 일 중에 하나기도 하다.
마케팅 계획안을 세우며 가끔 눈 앞이 깜깜해질 때가 있는데, 바로 도서의 메인 타깃이 내가 아닐 때다. 그러니까 나는 30대 초반의 사원인데, 육아서라던가 은퇴 후의 삶을 준비하는 메시지를 가진 책을 맡게 될 때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오래 고민한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출간하는 종합출판사 직원의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익숙하지 않은 포지션을 맡게 되었을 땐, 평소보다 더 많은 사전조사와 인터뷰가 절실하다. 그들이 자주 보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커뮤니티에 들어가 검색을 해보고, 주변의 친구들과 회사 선배들에게 끊임없이 묻는 일. 마케터란 평소에도 세상에 먼저 관심을 갖는 일이기에, 기획을 세우는 과정은 오르막길이지만 그럼에도 새롭고 재밌다.
하지만 여전히 나를 어렵게 하는 감정이 있다. 바로 책임감이다. 마케팅 계획을 세우는 일은 갓 탄생한 어린 책이 힘을 갖고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지도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밑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책임감이 언제나 무겁게 뒤따른다. 그건 직업인으로서의 책임도 있지만, 세상에 태어난 문장에 대한 책임이기도 하다. 어렵게 태어난 문장들. 내게 좋은 것이 다른 이들에게도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만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처음 원고를 받는 날엔, 언제나 첫인상을 기억해 둔다. 이런 점을 사람들이 좋아하겠구나, 여기엔 이런 이미지가 어울리겠구나, 저 이벤트와 연결하면 재밌겠다, 하는 작은 메모들을 적어둔다. 비슷한 이야기라도 어떻게 소개되느냐에 따라 다른 길을 걷은 온라인 세계의 수많은 콘텐츠를 기억한다.
그러다 문득 오래 공을 들인 일들이 하나 둘 순서대로 자리를 찾아가고, 마케팅 계획안을 지도삼아 어두운 길을 더듬더듬 찾아갈 때. 그래서 책이 조금씩 빛을 발하는 순간들이 맞이할 때가 있다. 꼬인 매듭을 결국 풀어내듯, 복잡한 초행길을 헤매다 목적지에 도착한 기분. 가는 길이 분명 어렵고 무겁고 힘들지만, 결국 독자들에게 긍정적인 피드백으로 돌아올 때, 나는 확실한 행복을 느낀다. 직업인으로서,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밑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적어도 문장들에게 미안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도 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지만 모든 결과가 최선이지 않은 날이 있음으로.
갓 취업을 했을 때, 오래된 친구가 그랬다. 너는 옛날부터 부모님이 서점을 했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 출판사에 갔구나. 등하교 때마다 얘기해서, 아직도 서점만 가면 내 생각이 난다던 친구의 얘기가 정작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서점 집 딸이고 싶어 했던 아이는 자라, 책 속에 쌓여 일을 하는 출판사 직원이 되었다니. 책 사이에서 책을 위한 일을 한다니. 매일 새로운 문장을 만나고, 그 문장 사이에서 길을 잃기도 내일을 찾기도 하면서. 신기한 일이다.
꿈 많았던 소녀는 결국 하루 8시간을 꼬박 일하는 직장인이 되었지만, 스트레스에 나지도 않던 흰머리가 하나 둘 자라는 직장인이 되었지만, 그래도 하루의 일부에서 좋아하는 순간을 발견한다. 그렇게 오늘 수집한 기쁨으로 내게 속한 많은 감정들을 다시 사랑해 본다. 직장인으로서, 직업인으로서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 100일 매일 쓰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해당 원고는 초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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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민│淸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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