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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민 Oct 10. 2020

물집

#39. '기타를 치기 위해서는 기타를 몸으로 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잘 읽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이 말이 부끄러워 말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책을 모르진 않는다. 지금 서점에서 가장 핫한 책과 저자는 아니까. 최근 읽은 책을 누군가 묻는다면 그럴싸하게 책 정보를 읊으며 아는 척하는 능력치를 가지게 되었지만, 최근 몇 달 사이 읽은 책이라곤 얇은 문구형 에세이 딱 한 권이다. 심지어 다 읽지도 못한. 책을 좋아해 출판사에 왔으면서, 언젠가부터 책과는 서먹한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애인인 다보에겐 귀여운 습관이 있다. 고향 집에 내려가기 전에 내 손에 귀여운 애정을 꼭 쥐어준다. 지난 추석 땐 큼지막한 전지 편지를 써줬고, 올 설엔 내 사진과 동영상을 모아 뮤직 비디오를 만들어 줬으며, 이번에 고향에 내려가기 전엔 내손에 책 한 권을 쥐어줬다. 자기가 고향에 내려가면 읽기 시작하라는 신신당부와 함께. 도무지 활자에 집중하기 어려운 요즘이지만, 귀여운 애인의 마음이 귀해서 책을 받아 들고 돌아온 날 밤부터 책을 폈다.


다보가 준 책은 <아무튼 기타>. 이 책을 몇 번이나 읽은 건지 모서리에 손때가 묻어 있었다. 수많은 아무튼 시리즈 중에서 그는 왜 이 책을 골랐을까. 평소 기타 연주를 좋아하던 사람이라 그런가 싶으면서도, 책과는 조금 먼 사람이기에 그가 이 책의 어느 부분에서 매력을 느꼈는지 궁금해졌다.


*추천곡: 권영찬-Are you ready?


몇 장 넘기지 않았는데, 연필로 꾹꾹 눌러쓴 글자들이 보였다. 그는 문장 사이사이에 어울릴 것 같은 노래 제목을 깨알같이 적어 두었다. * 꼭 들으며 읽을 것. 하는 메시지와 함께. 가뜩이나 작은 크기의 책이라, 책을 옆으로 탈탈 털면 글자가 튀어나올 것처럼 어느 페이지는 글자로 빼곡했다. 그의 추천곡을 따라 노래를 켠 뒤, <아무튼 기타>를 읽기 시작했다. 나를 멈칫하게 만든 문장도 있었다.


‘그렇게 난생처음으로 기타를 엉거주춤 잡아보았다. 그날 내가 깨달은 것은 기타를 치기 위해서는 기타를 몸으로 안아야 한다는 것이다’라는 문장에 다보는 물결 표시를 진하게 치고선, 이렇게 메모해 두었다.


‘손에 익숙하지 않은 기타를 연주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기타를 안는 것이다. 낯설어 두렵고 불편하지만,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선 온 몸으로 낯선 무언가를 안아야 한다. 손가락에 쥐가 날 것 같고, 딱딱한 굳은살이 생기지만 그런 과정이 다음으로 나를 이끄니까. 그런 것들이 쌓여 나만의 고유한 색깔을 만들 것이다.’


좁은 여백에 구겨 넣은 듯한 글자를 읽는데, 좁은 공간에서 기타 연주를 듣는 것처럼 마음이 둥둥거렸다. 솔직히 그가 메모하지 않았다면, 내게 저 문장은 그저 그랬던 문장. 그러니까 문장이 그저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메마른 사막 같은 내 마음에 세상 어떤 것이 들어와도 내게 보이는 건 그냥 까만 글자였을 것이다. 그런데 저 문장이 두터운 메마름을 단박에 뚫고 훅 쏟아졌다. 마른땅이 쏟아지는 반가운 소나기처럼. 기타를 연주하려면 기타를 가장 먼저 안아야 한다는 그 흔한 말에, 어쩌면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그런 말에 푸석한 마음이 조금씩 꿈틀거렸다. 오랜만에 겪는 기분이었다. 문장 하나로 마음이 둥둥 울린다.


맞다, 내가 이래서 책을 좋아했지. 누군가의 기억이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둥둥 울리는 순간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지.



회사에선 한 달에 스무 권이 넘는 책이 세상에 태어난다. 책이 태어나면 온라인의 모든 콘텐츠를 세팅하고 만들고 체크한다. 매 초마다 흐르는 온라인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정적인 책이라는 콘텐츠를 들고 서 있는 기분은 뭐랄까. 뭔가 특별한 것 같기도, 느린 것 같기도 했다. 유난히 느린 걸음을 가진 콘텐츠를 들고 빠르게 흘러가는 세계의 사이에서 수많은 메일을 쓰고, 더 많은 독자에게 닿기 위한 온갖 날갯질을 한다. 며칠 내내 카피를 고민하고 야근을 한다. 책 밖의 있는 이들은 절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쓰는, 반복되는 이야기 속에서 어쩌면 나는 살짝 지친 게 아닐까 생각했다.


다보가 아니었으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겠지, 이 문장도 만나지 못했겠지. 적은 확률로 읽었더라도 글자만 보며, 책을 읽지 않는 내게 죄책감만 늘었을 테지. '읽지 않는다'는 죄책감으로 한 달 내내 가방에 책을 넣어 다니면서도, 결국 다 읽지는 못했겠지. 그런 내 마음을 똑똑 두드린 다보가 건넨 책. '기타를 치기 위해서는 기타를 몸으로 안아야 한다는 것이다'는 뻔한 말로,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나를 격려하는 것도 위로하는 것도 결국 다시 책이었다. 새로운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내게 주어진 것을 안아야 한다는 다보의 메모가 나는 왜 그렇게 슬프고 아름다웠을까.


좋아했던 마음이 먹고사는 일이 되었을 때, 잘 해내고 싶은 마음만큼 잘 해내지 못할 때, 내 마음과 상관없이 좋아하는 마음이 사회의 모서리에 넘어질 때마다 흔들렸다. 2년 차 마케터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사회에 내린 뿌리가 얕은 만큼 누군가에게 별 것도 아닌 것들에 자주 휘청이고, 가장 먼저 좋아하는 마음을 놓아버리곤 했다. 놓아버리는 것만큼 쉬운 건 없었으니까. 그러다 우연히 다보가 건넨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잊어선 안 되는 두 가지를. 여전히 나는 책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과 지금 겪는 모든 과정은 어쩌면 내가 책을 좋아해서, 책을 안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떤 물집 같은 거라는 걸.


다보가 주고 간 <아무튼 기타>를 두 손으로 꼭 끌어안았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일은 책과 함께하는 나를 꼬옥 안아주는 게 아닐까 싶어서. 다보가 고향에서 돌아오면 오늘의 느낌을 말해줘야지. 네가 왜 이 책을 골랐는지 알 것 같다고. 그리곤 꾸욱 안아줘야지. 내게 가장 필요한 말을 주어 고맙다는 마음으로.


(책은 다른 책이지만) 책 읽는 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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