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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민 Sep 04. 2020

가지에 대한 내 최초의 기억

#4. 사랑을 먹고 누군가는 자란다.


얼마 전 다보가 해준 가지 된장 덮밥의 맛이 며칠이 지나도 입 속에서 아른아른 떠올라서, 오늘 퇴근하자마자 가지 된장 덮밥을 만들었다. 물론 요리사인 다보와 일반인인 나의 요리 레벨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나서, 나의 가지 된장덮밥은 다보가 해준 것보단 별로였지만. 그래도 나름 요리 프로그램 애청자 10년 경력이 있는 사람이라, 얼추 비슷한 맛이 났다.(그래도 다보 손맛과 정갈함은 못 따라 가..)



가지를 숭덩숭덩 크게 썰고, 가지만큼 양파도 큼직하게 썬다. 달구어진 팬에 기름을 두르고 마늘을 솔솔 볶다가 기분 좋은 마늘 향이 올라오면 양파와 가지를 넣고 볶고, 된장 크게 두 스푼 턱. 슥슥 볶다 보면 맛있는 된장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운다. 따끈한 밥 위에 가지 된장을 잔뜩 올린 뒤, 마지막으로 참깨 톡톡 뿌려주면, 가지 된장 덮밥 끝!


어? 맛있다. 홀로 복작복작 만든 보람이 있다. 깔끔하게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기분 좋게 부른 배를 손으로 두드리며, 다보에게 전화를 걸어 자랑을 했다. 네가 저번에 만들어 준 가지 된장 덮밥을 오늘 해봤는데 생각보다 맛있었다고. 가지를 한 평생 싫어하기만 했는데, 가지의 진가를 너무 늦게 알아 억울하다는 나를 보고, 다보는 어른이 된 거라 했다.


음, 어른이라.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 가지를 싫어하던 사람이 가지를 먹게 되는 일일까. 아마 그건 싫다고만 생각했던 무언가의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는 일 아닐까, 다보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어른이라면 정말 나는 어른이 되었구나, 하고 홀로 귀여운 뿌듯함을 느꼈다.



가지에 대한 내 최초의 기억은 '가지 물김치'였다.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 집에 가면 꼭 빠지지 않던 신기한 반찬이자. 아빠가 가장 좋아한 반찬. 아빠는 할머니가 만들어 준 가지 물김치만 있으면 밥 두 공기는 뚝딱 했다. 입맛이 없을 때 할머니가 해 준 가지 물김치 국물만 먹으면 금방 입맛을 회복하시곤 했다.


근데 나는 이 가지 물김치가 너무 싫었다. 대구에 다녀온 날이면 할머니는 늘 가지김치를 가득 싸주셨는데, 집에 돌아와 매 밥상에 가지김치가 올라올 때면 짜증이 났다. 우선 원래 어두운 가지 색깔이 국물에 젖어 까매서 낯설었고, 유난히 시큼한 냄새가 싫었다. 한 번은 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흐물흐물한 가지를 입에 넣었던 날. 오만 인상을 찌푸리는 나를 보며 귀엽다고 호탕하게 웃던 아빠의 웃음소리가 떠오른다.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은 물컹한 식감, 요상한 주황색 국물에서 나는 시큼함, 그리고 함께 씹히는 생 당근의 맛. 으으.  아빠는 이게 뭐가 좋다고 쭉 들이키곤 으아, 맛있다 한 거야!


유년의 내게 가지 물김치 맛은 말 그대로 충격이었고, 내가 가지를 싫어하게 된 건 정말 가지 물김치 때문이었다. 물컹하고 시큼하고 맛없게만 느껴졌던 맛. 그랬던 가지가 이제 와서 이렇게 맛있는 건, 정말이지 배신이 아니겠는가! 이건 내 모든 유년을 배반하는 큰 사건이기도 했다. 태어나 가지를 맛있게 먹은 최초의 기억에서, 나는 아빠를 떠올렸다. 가지 물김치를 두 손으로 들고 시원하게 마시던, 크 소리를 낸 다음 할머니를 바라보며 해맑게 웃던 아빠의 얼굴이.




어쩌면 가지를 향한 내 최초의 기억은 사랑이 아니었을까. 맛없다고, 늘 싫다고만 생각했던 가지에 대한 최초의 기억에서, 오늘의 나는 조금 다른 장면이 보였다. 대구 할머니 집에 갈 때마다 빠지지 않고 상에 나왔던 가지 물김치. 언제나 국물 넉넉하게 아빠 앞에만 놓이던 물김치. 서울로 돌아올 때마다 바리바리 싸 준 물김치 두 통. 누나라는 이유로 늘 한 통을 무겁게 들어야 해서 투덜거렸던 유년의 기억에서, 오늘 나는 자꾸 할머니의 사랑이 보였다.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 그건 싫어만 하던 가지에서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일. 미처 다 알지 못했던 사랑을 뒤늦게 발견하는 일 아닐까. 다보 덕분에 나의 세계는 또 다른 내면의 문을 연다. 할머니가 아빠를 위해 담은 사랑과 다보가 나를 위해 담은 사랑의 접시가 우리 앞에 있다. 사랑을 먹고 누군가는 자란다. 어쩌면 가지에 대한 내 최초의 기억은 사랑이었겠구나 싶던, 어느 따듯한 날.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한 저녁이었다.





청민│淸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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