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이렇게 컸나 싶다가도, 든든한 친구가 되어줘서 고맙다가도
낯선 곳에선 용기가 생긴다. 나를 아는 이가 없는 이 골목에선 꼭 춤도 출 수 있을 것 같다. 낯선 이에게 말을 걸고, 가보지 않은 길을 성큼 가보며, 궁금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묻지 못했던 질문도 던질 수 있는 용기가 떠나오면 슬쩍 생기곤 한다.
먼 곳으로 긴 여행을 떠나온 어느 날. 찬과 길을 걷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세상에서 나와 가장 닮은 사람은 어쩌면 찬이 아닐까. 엄마도 아빠도 아닌, 찬이 아닐까.(물론 순서를 따지자면 내가 찬을 닮은 게 아니고, 찬이 나를 닮은 거겠지만.) 같은 부모님 아래 태어나 같은 환경에서 자라고 오래 같은 밥을 나눠 먹은 사람. 가진 상처도 또 가진 장점도 다르지만 분명하게 같은 사람. 얼굴에서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또렷하게 가진, 세상에 나 말고 유일한 사람.
그러다 낯선 여행지에서 용기가 생겼는지, 찬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가 남매여서 서로에게 뺏고 빼앗긴 걸 셈해보자고. 그 말 한마디에 찬은 고민도 하지 않고 말했다. ‘대표적으로 롤러브레이드랑, 아이폰 3gs가 있지. 누나, 난 아직도 그것만 생각하면 아오. 생각해 보니 나 진짜 착한 동생이었네?’
말이 끝나자마자 나온 말은, 아마 오래 기억하고 있는 탓이겠지. 찬의 말을 듣자 그제야 나는 기억했다. 초등학생 때 집에 온 손님이 동생에게만 롤러브레이드를 사주는 바람에 샘이 나 내가 빼앗아 탔지. 사이즈가 네게 크다는 이유로. 그리고 아이폰 3gs. 출시되자마자 세상에서 ‘혁신’이라고 불리던 걸, 나 주면 안 되냐고 며칠을 따라다니며 졸랐지. 기억난다.
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군대에서 내가 목도리 사준 거 기억나? 그때 군대에서 진 짬뽕이 1,500원이었는데, 내가 그 돈 몇 푼 아끼려고 맛없는 쌀국수를 사 먹으면서 돈 모아서, 누나 그 목도리 사준 거야. 지금 생각하니까 울컥하네. 이건 빼앗긴게 아니고 내가 준거지만.’
평소 같았으면 그 말에 바로 공격태세를 취했을 텐데, 찬의 말이 구구절절 다 맞는 말이었기에 보탤 말이 없어 다시 물었다. 그럼 내가 너에게 준 건 뭐냐 물으니, 이번엔 고민이 길다. 길어지는 침묵에 괜히 마음이 찔려 목이 탔다. 내가 그렇게 나쁜 누나였나.
‘누나는 나를 깨웠지. 내가 이별하고 정신 못 차릴 때의 유일한 조언자였고, 찾아온 기회 앞에서 하지 않겠다는 나를 푸시했고, 그래서 덕분에 유튜브 채널을 열었지. 아, 돈이 아까워서 영국 교환학생 가지 않겠다는 것도 가라고 가라고 밀었고, 또 코로나로 영국에서 빨리 돌아오라고 했고. 생각해 보면 아찔해. 그때 못 왔으면, 아직 영국에 있었을 거야. 해준 거 많네. 중요한 순간에 지켜준 거니까. 아, 용돈도 줬네.’
나도 찬이 내게 빼앗은 것을 생각해 보려는데,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제와 돌아보니 찬이 내게 빼앗은 것보다 준 마음이 더 많았다는 걸, 어리기만 했던 찬에게 지나고 보니 내가 얻은 품이 더 많다는 걸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랄까. 늘 찬에게 엄마의 사랑을 빼앗겼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와 돌아보니 나는 무엇 하나 빼앗긴 게 없는 풍족하고 미련한 장자였다. 미안한 마음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냥 어깨를 툭 치며 야, 고맙다 하는 말 밖에.
걷는 동생의 뒷모습을 보는데, 이제는 제법 어깨도 팔도 단단해졌다. 여리여리 했던 얼굴에도 힘이 생겼다. 내 기억 속에 있던 찬과 지금의 찬은 달라졌다. 내가 독립을 하고 찬이 영국에 다녀온 이후에는 더더욱. 같은 품에서 태어났지만, 이제 우린 서로가 어떤 하루를 맞이하는지, 어떤 이들을 곁에 두고 사는지 알 수가 없다. 매일 보는 회사 동료들보다 동생의 안부를 더 모를 때가 대부분인데, 아빠가 나 초등학생 때 맨날 몇 반인지 헷갈려하는 마음이 이런 거였을까 찬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알고 있다. 달라진 서로의 세세한 부분은 다 알 수 없겠지만, 그래도 찬은 어디서든 누구와도 잘 지내고, 잘 해낼 거라는 걸. 쉽게 부러지지 않고 건강하고 밝게 단단하게 지낼 거라는 걸. 함께 엉켜 자란 남매에겐 부러지지 않는 강한 심지가 사이에 연결되어 있다. 뺏고 빼앗기며 서로를 의식하고 질투하고 싸우면서도, 세상에 나와 가장 닮은 사람이 있다는 어떤 안도감.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내가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있어준다는 믿음. 마치 디딤돌처럼 말이다.
나란히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여행지의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우리는 앞으로도 잘 지내겠구나. 삶에서 어떤 언덕을 만나더라도 지금까지의 우리처럼, 농담 한 번 던지고 투닥투닥 어깨 한 번 툭 치면서 이겨낼 수 있겠구나. 언제 이렇게 컸나 싶다가도, 든든한 친구가 되어줘서 고맙다가도. 빼앗아서 미안하다가 또 빼앗겨줘서 고맙다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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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민│淸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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