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평래옥은 우리에게 어떤 공간이었을까.
을지로에 갈 때면 꼭 평래옥을 찾는다. 따듯한 국물이 그리워지는 겨울에도 이곳에선 물냉면을 주문한다. 오랜만에 찾은 평래옥. 창가로 길가의 생기가 들어왔고, 여전히 찾는 사람은 많았다. 달라진 거라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만 계셨던 자리에 이젠 내 또래의 애들도 보이는 것일 뿐.
십년 전 쯤, 평래옥이 을지로 골목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초등학생 때는 명동성당 교차로 쪽, 중앙 시네마 건너편의 낡은 건물에 있었는데. 들어가는 입구 간판 글씨체가 마치 어렸을 적 다녔던 서당 선생님이 쓰신 것 같아서, 어린 내게 어딘가 음침하고 어둡게만 느껴졌던 문. 그 문을 넘어 가게로 들어가면 정겨운 옛날 큰집처럼 오래된 나무 벽과 나이테가 보이는 나무 상이 있었다. 물 대신 콤콤한 닭육수를 내어주던 곳.
기억 속 그곳엔 언제나 아빠가 있었다. 아빠의 손을 잡고 가서 자주 먹던 평양냉면. 퇴근 후 아빠의 동료들과도 갔던 기억도 난다. 냉면이라곤 새콤달콤하지만 질긴 칡 냉면만 알고 있던 초등 입맛의 시절이라, 맹맹한 평양냉면을 먹으며 인상을 팍 쓰던 나를 보고 귀엽다고 웃던 아빠와 아저씨들. 호탕한 웃음이 싫지 않아, 냉면을 먹으러 간다는 아빠 뒤를 늘 종종 따라가곤 했다.
내가 스무 살 즈음, 평래옥은 중앙 시네마 건너편에서 을지로 골목으로 옮겼고, 요즘 식으로 싹 인테리어를 해버려 예전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투박한 통나무 식탁에서 세련되고 편안한 식탁으로 변했고, 어둡기만 했던 입구도 환하고 널찍한 게 밝게 변했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딱 하나, 이 평양냉면의 맛. 닭 육수를 먹으며 인상을 찌푸리던 초등학생이 이제는 냉면 국물까지 다 마셔버리는 서른이 되었다.
가끔 아빠가 보고 싶은 날엔 이곳에 왔다. 아빠와 스물여덟 해를 살고 겨우 두 해를 떨어져 살았으면서도, 아빠가 보고 싶은 날이 많았다. 보고 싶지만 차마 전화를 할 수 없는 날, 속으로 삭혀야 하는 날. 회사에 다니는 날이 늘어날수록, 나는 을지로를 자주 찾았고 물냉면을 시켰다. 고명의 달걀을 한 입에 먹고서, 젓가락으로 면을 설기 설기 풀고, 함께 내어준 닭 무침 하나에 면을 싸서 먹는다. 퇴근 후 냉면을 먹던 아빠처럼.
예전엔 냉면을 먹고 나면 거기에 김치말이 국수를 말아 주셨다. 나는 냉면보다 김치말이 국수를 좋아했다. 아빠가 아빠 냉면, 내 냉면까지 다 먹고 나면, 거기에 김치와 참기름, 깨를 잔뜩 넣어서 고소하게 말아주던 차갑고 달던 김치말이 국수. 어느 순간 김치말이 국수는 사라졌고, 당연하게 옆자리에 있던 아빠 없이 홀로 냉면을 먹는다.
기억 속 아빠는 젊었는데. 생기 넘쳤고, 뭐랄까 청년만이 낼 수 있는 에너지가 가득했다. 세상의 나쁜 것들 앞에서 씩씩했고 자유로웠던 나의 아빠. 어려도 알 수 있었지. 아빠의 빛나는 생기와 젊음과 패기 가득했던 뜨겁고 신기했던 날들을. 나는 똑똑히 보았지. 그날의 아빠를. 나를 먹여 살리느라 포기하는 것이 많았던 아빠 말고, 삶의 무게에 무겁게 묵묵히 걷는 아빠 말고, 책임져야 할 것들 사이에서 말을 아끼는 아빠 말고. 어렸고 어려서 빛났고 그래서 예뻤던 아빠가.
돈을 벌어 보니까, 이해되지 않는 상황들을 묵묵히 참아야 하는 순간들이 찾아와 보니까, 삶이 내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차보니까. 그제야 알 것 같은 마음이 있다.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누군가의 세계. 그럴 때면 그리워졌다. 낡은 탁자에 둘러 앉아 평양냉면을 먹던 젊은 아빠와 인상을 쓰는 내가 귀엽다던 다정했던 웃음들과 그 웃음들이 좋아 김치말이 국수를 먹던 어린 내가.
평래옥은 우리에게 어떤 공간이었을까. 그날들을 아빠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는 마음에 그냥 냉면 국물을 벌컥벌컥 다 마셔버렸다. 삼삼하고 먹먹한 맛. 아빠와 다시 꼭 먹고 싶은 맛. 오래 잊고 살고 있었다면, 아빠에게 말해주고 싶던 그날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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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민│淸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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