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긴 생머리를 단발로 자르며 생각한 것들
#1.
내 생애 헤어스타일은 딱 두 가지였다. 긴 생머리 아니면 단발. 외모를 꾸미는 데 서툴 뿐 아니라 큰 관심이 없어서기도 했지만, 긴 생머리를 좋아했기 때문도 있다. 미용실엔 일 년에 한 번 정도 상한 머리를 잘라내러 가는 것 말고는 잘 가지 않았다. 긴 생머리는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머리이기도 했고, 개성이 강한 단발과 달리 무난해서 어떤 옷을 입어도 튀지 않고 잘 어울려 좋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좋아하던 긴 생머리를 무심하게 툭 잘라버릴 때가 있는데, 스트레스가 목구멍까지 끝까지 차오를 때였다. 그럴 땐 머리를 아주 싹둑, 미련 없이 끊어버리곤 했다. 특히 좋아했던 누군가와 헤어졌을 때. 이별하고 머리를 잘랐다는 그 흔하고 뻔한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머리라도 끊어내니 기분이 좋아졌다. 긴 생머리칼을 좋아했지만, 때로는 머리에 묶인 밧줄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으니까.
머리를 잘라 버리면 샴푸를 세 번 네 번 짜서 쓸 일도 없고, 잘 때 머리가 뭉쳐 불편할 일도 없고, 포니테일로 묶었을 때 누가 뒤에서 잡아당기는 무게를 느끼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잘라낸다는 건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변화를 준다는 건 예상보다 마음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다.
2년 넘게 기른 긴 생머리를 잘라버리겠다고 생각한 건, 삶에 변화를 주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끝나버린 것 같은 이천 이십 년에 반항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꼭 무언가를 해야만 내일로 넘어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하는 마음이 발목을 잡는 요즘.
#2.
동네 미용실에서도 솜씨가 좋다고 소문이 난, 규모가 큰 샵의 원장님께 머리 예약을 잡았다. 회사 동료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할 만큼 인기 만점인 분이라 믿음이 갔지만, 그의 보조는 서툴기 그지없었다.
보조 스텝은 내 머리를 하는 몇 시간 동안 끊임없이 실수를 했는데, 그는 자신이 실수를 했는지 조차 모르는 듯 해맑았다. 덕분에 나는 30분 일찍 끝날 수 있는 시술 시간을 다시금 버텨야 했다. 첫눈에 보아도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잔실수를 할 때마다 뒤에서 다른 스태프들이 눈짓을 주었지만, 그의 손은 계속 미끄러졌다.
예를 들면 원장님이 머리에 파마 약을 바르고 롤로 마는 과정에서, 보조 스텝의 일은 원장님이 머리를 잘 말 수 있도록 곁에서 물건을 건네는 일이다. 롤, 부직포처럼 생긴 얇은 솜 두 장, 머리카락에 직접적으로 열이 닿지 않도록 하는 두꺼운 솜 그리고 마지막으론 노란 고무줄 순서로 동일한 순서로 물건을 건네면 되었는데, 그는 자꾸 롤을 건네기 전에 솜을 주거나, 롤 다음에 고무줄을 건네는 잔 실수를 하곤 했다. 잔 실수는 원장님이 머리를 마는 속도를 내다가도 멈칫하게 했고, 다시 속도를 내다가도 멈추게 했다. 계속 웃으며 대하던 원장님도 나중엔 표정이 굳더니 한숨을 쉬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렇게 다 할 거면, 곁에 네가 없어도 되지 않겠니?’
능숙자의 입장에서 보는 초보자는 얼마나 더딜까. 참고 참다가 툭 던진 원장님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실수를 잔뜩 한 초보자의 마음도 모른 채가 안됐다. 나도 회사에서 저렇게 서툴까. 선배들이 나를 이렇게 꾹꾹 참아주고 있는 건 아닐까. 일머리라는 건 시간과 함께 자연스럽게 늘어나는 기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나 자신을 돌아보고 채근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이런 풍경이 요즘은 눈에 걸린다. 능숙자와 초보자가 나란히 있는 모습. 나란히 서서 각자의 시간을 견디는 장면이, 자꾸 내 얘기만 같아 오래 잔상처럼 남는다. 팀원으로서 나는 제 몫을 잘 해내고 있는 걸까. 누군가를 자꾸 참게하고 있진 않을까. 경력이 낮은 2년 차 회사원은 여전히 아직도 매일매일 스스로에게 묻는다.
잘 해내고 싶은가 보다, 나는.
#3.
만나는 사람마다 '잘 잘랐다!'라고 했다. 진심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 마음과 똑같은 말을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벼운 느낌이 보기 좋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 전엔 무거운 느낌이었나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있는 그대로 받아 드리는 연습을 하자. 거의 허리까지 오던 긴 머리가 아깝지 않으냐고 묻는 이도 있었다. 머리칼은 또 자라고, 나는 또 머리칼이 잘 자라는 사람이라 괜찮다고 했더니 부럽다고 했다. 나는 부럽다고 말하는 이를 귀엽다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잘라내니 기분이 좋았다. 뭔가 '예전 것은 가라, 새 것이 왔으니!'하는 느낌이랄까. 그게 나를 누르고 있던 어떤 압력이라면, 괴롭게 하는 무언가라면 더더욱 잘라냄이 반갑다. 똑 잘라버리고 미용실을 나서며 머리뿐 아니라 발걸음도 가벼운 듯했다. 더 이상 머리칼이 등에 닿지 않았다.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겨도 금방 툭 끝이 보였다. 아, 가벼운 마음. 어디든 뛰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 100일 매일 쓰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해당 원고는 초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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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민│淸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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