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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민 Oct 27. 2020

100일, 매일 쓰는 마음에 대하여

#52. 그럼에도 불구하고


.

100일 매일 쓰기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벌써 반이나 지났다. 47개만 더 쓰면 이번 프로젝트는 마감되고, 가지 않을 것 같던 이천 이십 년의 마지막 달이 되며, 나는 서른에서 다시 한 살을 먹으며 빼도 박도 못하는 꽉 찬 삼십 대가 된다.     


처음 100일 매일 쓰기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건 사소한 이유였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아서. ‘열심히 쓰겠다’는 다짐은 언제나 새해 소망처럼 쉽게 잃어버리는 편이었지만, 이천 이십 년은 뭐랄까. 내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가져보지도 못한 채, 내 것을 빼앗긴 것 같았다. 지금 쓰지 않는다고 해서 내 서랍에 들어있는 무언가를 도둑맞은 기분이랄까. 빼앗긴 자리엔 여러 감정이 남았는데, 그중 하나가 죄책감과 불안함이었다.     


작년에 쓴다 말만 하고선 쓰지 않는 삶을 살았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근본 없는 생각으로 노력하지도 않았다. 읽지 않았고 쓰지 않았으며 고민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천십구 년엔 출판 계약 파기, 이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이의 민낯의 발견, 거기에 취업과 새로운 도시에 대한 적응까지 한 번에 몰아치듯 나를 찾았다. 힘을 쏟아야 할 곳은 글 말고도 스물아홉의 내겐 많았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생각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니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무엇이든 버리는 건 쉽지만, 회복하기는 왜 이렇게 어려운지. 시간과 함께 나를 휘청이게 했던 여러 이야기는 나름의 방법으로 정리했고 잔잔해졌다. 하지만 어딘가 텅 빈 것 같은 기분은 계속 들었다.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의 출간 소식들, 꼭 출간이 아니더라도 꾸준히 쓰면서 그들이 얻는 새로운 기회들. 부러웠다. 하지만 그것보다 부러웠고 나를 초라하게 만든 것은, 쓰는 그들의 하루였다. 씀이 느는 하루, 뭐라도 쓰면서 나아가는 하루. 언젠가 내가 좋아했던 그런 하루.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 100일 매일 쓰기 프로젝트는. 나이를 먹으면서 좋아하는 일도 함께 늘고 싶어서. 잘 쓰고 싶다기 보단,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서. 늘어난 거라곤 몸무게뿐이 아니었으면 해서.





이.

하지만 100일 매일 쓰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고, 나는 매일 밤 미로를 헤맸다. 세 가지 이유에서였는데, 우선은 더 놀고 싶었다. 친구들을 뿌리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 무엇보다 마음을 어렵게 했다. 이사를 앞둔 동네 친구 집에서 맛난 걸 해 먹고, 앉아서 내가 좋아하는 보드게임을 연달아 세 판을 했던 날. 시간은 열한 시가 넘었고, 약속한 마감은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부랴부랴 친구들을 두고 집으로 뛰어 와 글을 마무리했다. 발걸음을 붙잡는 건 친구이기도 했지만, 여름밤과 여름과 가을 사이의 달콤한 바람이기도 했다. 밖으로 나와, 놀자. 바람은 언제나 나를 속삭였지만, 허벅지를 찌르며 집으로 돌아왔다. 솔직히 몇 번은 못 지킨 적도 있다.


그다음은 퇴근이 없다는 것. 하루 8시간 꼬박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저녁밥을 먹고선 다시 홀로 만들어 놓은 마감을 위해 책상에 앉았다. 도무지 퇴근이란 게 없었다. 자정까지 빼곡하게 시간을 써 문장을 채웠다. 쓰고도 마음에 들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었고, 자주 마음에도 들지 않는데 무엇을 위해 하루를 다 써버리고 있는가 고민하기도 했다. 그런 밤엔 침대에 누워 매일 쓰기의 시작을 다시 생각하곤 했다. '나는 잘 쓰기 위해 매일 쓰고 있는 게 아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매일 할 수 있다는 걸 의심 많은 스스로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거야.' 잘 쓰는 사람은 세상천지 삐까리고, 나는 잘 쓰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지. 다짐을 새해 소망처럼 늘 잊어버리는 사람이지만, 오십일이 넘도록 올 수 있었던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 덕분이었다.


마지막으론 쓸 말이 없어 힘들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도저히 쓸 말이 없어서, 매일 쓰기 프로젝트가 딱 2주가 지난 시점부턴 매일 밤 발을 동동 굴렸다. 쓸 말을 찾아서 집에 있는 3년 치 일기장을 꺼내 정독하기도 했고, 5년 치 여행 사진을 하나도 빼먹지 않아도 돌려 보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의 방점은 무엇이든 '매일 쓰기'였기 때문에, 사실 한 문장만 쓰고 넘어가도 되었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기승전결의 힘이 부족하더라도 한 편을 써내고 싶었다. 퇴고는 언제든 다시 할 수 있고, 이 온라인 공간은 나의 연습장이기도 했기 때문에.



셋.

쓸 말이 없을 때마다, 예전 글을 자주 가져왔다. 무려 이전 출간을 준비하며 에세이를 써둔 덕분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쓸 말이 없는 날엔, 그 날의 원고를 가져와 수정했다.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은 글은 제외하고, 숨겨 놓은 밤 조림 꺼내 먹듯 하나씩 쏙쏙 빼와 사용했다. 그렇게 모아 둔 알밤을 모두 다 써버린 날. 올릴 게 없어서 후다닥 뭐라도 써야 해서 발을 종종 굴렀다는 내 말을 듣고 다보가 말했다.


"재고정리를 싹 한 거야, 당신은.

완전히 비웠기 때문에, 이젠 채울 수 있지 않을까?


매일 쓰기를 도전하면서도 쓸 게 없거나 몸이 힘든 날엔 쉽게 옛날 원고에 기대 수정만 해서 업로드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젠 그럴 수 없으니까. 당신의 창고를 대청소 한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어. 그래서 다시 깨끗한 공간에서, 아무것도 없지만 다시 시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채울 수 있는 공간이 더 많아졌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이렇게 써 온 52일.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48일. 텅텅 비어버린 창고 앞에서, 나는 혼자만의 싸움을 하고 있다. 오늘도 쓸 말이 없어서 밤 11시까지 망설이다가,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이 문장을 쓰고 있다. 알고 있다. 부족함이 많은 페이지라는 걸. 잘 쓰고 싶은 건 아니다. 그냥 쓰고 싶을 뿐이다. 의지가 약한 내가 가장 오래 좋아한 일이기도 하니까.


서른이면 어떻고, 빼앗겨버린 이천 이십 년이면 어떨까. 오래 쓰지 않았으면 어떻고, 잘 쓰지 못하면 어떨까. 친구들이 출간을 하면 어떻고, 나는 멈춰 있으면 또 어떨까. 그냥 한 걸음을 내딛으면 되지 않을까. 바라기는 좋아하는 마음을 그저 잃지 않고 싶을 뿐이다. 잃는 건 쉬워도 회복은 어렵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으니까. 여기까지 쓰다 보니 오늘의 페이지는 일기에 가깝다는 걸 깨닫고, 이 페이지를 지워버리려다가 발행을 누르려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그저 좋아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100일 매일 쓰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해당 원고는 초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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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민│淸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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