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금요일 오후, 날이 좋았다.
목요일,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자정이었다. 몇 시간 동안 넘게 저자 강연회 스케치 영상을 촬영한다고 바짝 긴장을 했더니, 온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평소보다 5시간 정도 초과된 근무 시간은, 근무 유연제 덕분에 금요일 오후 업무 시간으로 상쇄할 수 있었다. 덕분에 반차를 쓰지 않고도, 금요일 오후 시간이 통으로 짠 생겼다.
금요일 오후. 노트북을 딱 덮고 무엇을 할까 고민했다. 어제 행사로 무리한 바람에 목이 건조하고, 피로에 다리가 땡땡 부었지만 그래도 선물처럼 주어진 시간을 집에서 뒹구는 시간으로 보내고 싶진 않았다. 일주일 동안 일하면서 뻐근해진 마음 근육을 풀어주고 싶었다. 조용하고 예쁜 곳에 가서 책 한 권 읽어주는 시간으로. 어디를 가야 하나 떠올리다가, 파주에 가보고 싶었던 카페로 목적지를 정했다. 일산에서 퇴근한 출판사 직원이 달콤한 금요일 오후 반차에 가는 곳이 또 파주라니.(파주에는 출판 단지가 있다)
용기 내어 나선 길, 날이 좋았다. 농익은 가을이 이젠 숨김없이 나뭇잎으로 자신의 색을 맘껏 드러낸다. 가을에만 볼 수 있는 가을의 빛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기울어져 내리는 가을빛 그리고 그 빛을 맞아 더 황금처럼 빛나는 은행잎이 마치 그림 같다. 나올까 말까 망설였지만, 나서길 잘했다. 맑은 하늘을 보자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일주일 동안 내 속에 쌓여있던 책 먼지들이 가을빛에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달까.
오늘 내가 찾은 곳은 파주 헤이리 마을에 있는 '황인용 뮤직 스페이스 카메라타'. 이름도 긴 이곳은 크고 오래된 스피커들이 멋들어지게 우뚝 서 있었는데, 마치 문을 여는 데 유럽의 어느 성당에서 마주친 웅장한 파이프 오르골을 보는 듯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따듯한 커피 한 잔을 내어 주신다. 온기가 있는 컵에 시린 손 끝을 녹이며, 높은 천장을 가득 채우는 음악의 몸짓을 듣는다. 마침 나오고 있는 곡은 낮은음이 많은 피아노 곡이었는데, 음 하나하나의 살이 모두 만져지는 것 같았다. 아름답다. 듣고 싶은 만큼 크게 소리를 키워 듣는 음악, 기분이 좋다.
그곳에 앉아 책을 읽었다. 읽고 싶었던 책을 읽는다. 지금만큼은 일로서가 아니라 좋아서, 읽고 싶어서. 책임감 없이 마음을 툭 놓고 흐르듯 문장을 읽는다. 누군가의 이목을 끌 수 있는 문장 말고, 내 마음을 두드리는 문장에 연필로 밑줄을 긋는다. 그렇게 앉은자리에서 책 한 권을 다 읽으니, 창밖엔 노을이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헤이리 마을에는 이른 밤이 찾아왔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감사합니다' 인사를 남기고 문을 닫고 돌아오는 길. 낯선 동네서 맞는 밤은 이상하게 늘 불안한데, 공간을 가득 채운 음악 덕분에 낯선 동네의 밤이 다정하게끔 느껴진다.
행복했다. 별 것 아닌 하루였는데, 마음에 충만한 가을빛이 들었다. 선물처럼 주어진 짧은 오후, 낯선 동네의 밤길을 걷는데 하루가 풍성했다. 평소와 별 다를 바 없는 마음으로 시작한 하루였는데, 끝에는 몽글몽글한 열매를 얻은 듯했다.
신기할 만큼 하루가 딱딱 맞아 떨어지기는 했다. 일산에서 파주로, 다시 파주에서 일산으로.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야 했지만, 기다리지도 않고 버스가 연달아 왔다. 횡단보도도 내가 걸으면 바로 파란 불로 바뀌었고, 버스에서도 내 몫의 자리가 비워져 있었다. 마치 나를 힘들게 하지 않도록 계절이 돕는 느낌이었달까. 오랜만에 음악을 들으면서 온전히 책을 읽는 혼자의 시간을 보낸, 평범하고 소박한 하루. 특별한 일 하나 없었지만, 충분히 행복했던 하루.
돌아오는 길. '충분히' 행복하다고 느꼈던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나, 저 멀리 지는 가을의 노을을 보며 생각했다. 잠깐 주어진 짧은 여유 하나로 평일엔 돌보지 못했던 계절을 살피고 나를 살핀다. 이렇게도 행복해지는 날이 있구나. 지치는 하루들 사이에 선물처럼 끼어든 행복이었고, 오늘 느낀 행복으로 며칠은 편안할 수 있을 듯했다. 잠시 마음을 기대고 내일을 다시 걸어갈 힘을 채운다. 뻐근해진 근육을 풀고,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
가을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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