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내가 새 마음으로 대하면, 오늘의 횡단보도는 새 곳이 된다는 것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버릇(?) 하나가 생겼다.
횡단보도 파란불이 켜지면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1등으로 횡단보도를 밟는 것.
(물론 좌우 차가 없는지 살피는 게 우선이다.)
횡단보도 앞에서 핸드폰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핸드폰을 하지 않고, 파란불이 켜지기를 기다린다. 신호가 변하면 사람들이 신호의 변화를 인지하기 전에 먼저 좌우를 살피고 먼저 발을 디딘다. 별 것 아니고,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일이지만, 먼저 앞서 나가면 묘하게 좋았다. 조금 오버해 말해보자면, 모두가 멍하니 있는 순간에 홀로 영특한 아이가 된 기분도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지나간 길이지만, 누구도 닿지 않은 공간에 먼저 발을 들인 기분이 든달까. 남들은 알아주지 않지만, 도로 위의 일등이 된 것 같은 작은 뿌듯함.
이상하고 희한한 나만의 버릇(혹은 의식?)으로 배운 나름의 교훈이 있다. 우선 남들보다 아주 조금 먼저 인지하면, 먼저 나아갈 수 있다는 것. 모두가 핸드폰에 고개를 콕 박고선 짧은 지루함을 달랠 때, 지루함을 참고 견디면 파란불을 먼저 인지할 수 있다는 점. 먼저 인지하면, 좌우를 먼저 살필 수 있고, 누구보다 빨리 호다닥 건너 지하철 입구에서 여유 있게 빠져나갈 수 있다.
그다음은 누군가 이미 발을 내딘 곳이라도 내가 새 마음으로 대하면, 오늘의 횡단보도는 새 곳이 된다는 것. 아무리 닳고 닳은 곳이고, 매일 지나가는 흔한 곳이라고 해도, 내가 발을 디딘 곳은 어제와는 다른 공간이 되는 듯했다.
누구에게 말하기도 창피한 이 쓸모없는 두 가지 배움은 생각보다 삶에서 쏠쏠하게 쓰였다.
삶이란 언제나 그렇듯 새로운 것을 늙게 했고, 회사 생활이라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늙어만 갔지 새로워지진 않았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들’이란 도장을 쾅쾅 찍고 내려오는 이해가 가지 않은 누군가의 결정들, 이름만 다르고 반복되는 회의들. 처음에는 신기했던 방식들이 시간이 지나며 익숙해졌고, 나름의 패턴이 생겼다. 세세한 구성만 다를 뿐.
패턴화 되어가는 사회생활에서 때로 나만 정체되어 있는 것 같은 날들이 있다. 늙어가고 낡아가는 일상의 순간들에서도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신기할 정도로 업무적으로 반듯해 보였다. 맡겨진 일을 뚝딱뚝딱 말끔하게 해내는 듯 보였다. 그들의 내놓은 결과물만 보는 나는, 일상의 반복에도 매몰되지 않고 진취적인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을 보며 때로는 부러움을, 절망을 갖기도 했다. 비록 그들의 속사정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하지만 나를 옭아매는 부러움과 절망과 미움은 순간적으로 치고 올라오는 듯해도, 금방 수그러들었다. 비록 내일 똑같은 패턴 앞에 같은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만, 퇴근 후 건물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빼곡히 기다리는 횡단보도 앞에 설 때면 나도 모르게 이상한 버릇이 툭 발동할 준비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다. 신호를 기다리며 그들의 얼굴을 살핀다. 지친 얼굴로 핸드폰을 보는 사람들,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하루를 털어내는 사람들. 그들의 얼굴에는 어딘가 멍한 피곤이 묻어 있다. 그들을 살피며 신호등을 기다린다. 파란불이 반짝 변하고, 사람들이 교차로로 쏟아진다. 매번 횡단보도를 먼저 밟진 못하지만, 그래도 파란불은 내가 먼저 발견했을 거야 생각하면 작은 한 걸음에 오늘의 기분이 좀 덜어진다.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며 자기 속에 쌓인 작은 부정들을 털어내는 사람이 길을 건너는 이들 중에 또 있을까. 퇴근 후 각자의 목적지로 걸어가는 사람들, 교차로를 건너는 수많은 이들 중에 나와 같이 특이한 사람이 또 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발걸음 하나로 마음을 털어내는 사람은 내가 유일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함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며 내일의 나는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란 막연한 희망을 품어본다. 부러움, 절망, 미움, 지침 같은 기분을 한 걸음으로 털어내는 연습을 하다 보면, 그것들을 넘어 새로움, 희망, 기쁨, 원동력 같은 긍정을 어제보단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삶에서도 회사에서도 나 스스로에게서도. 잘 털어내는 사람이 또 잘 얻을 수 있으니까. 또 먼저 알아채고 인정하는 사람이 먼저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패턴화 되어가는 생활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살 수는 없겠지만, 작은 기분들을 털어내는 연습을 해본다. 삶에 숨겨놓은 이상하고 묘상 한 습관을 발동시키면서. 어제와 별 다를 것 없는 오늘의 세상이지만, 내 마음이 새 것이라면 내일의 세상도 새 공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변한 건 마음뿐이었지만, 마음이 공간을 바꾸기도 하니까. 때로 모든 변화는 누군가의 마음 하나에서 시작하는 법이니까.
퇴근 후 교차로를 건넌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오늘도 나는 홀로 이상한 뿌듯함을 느낀다. 이상하고 이상하지만 나는 이렇게 다시 새로운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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