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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민 Nov 08. 2020

새롭게 마음을 붙인 공간들

#62. 지난주 방문한 매력적인 공간들(2)

여행을 좋아하는 게 먼저였을까, 아님 자주 떠나보았기에 여행을 좋아하게 된 걸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의 시작은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이사를 많이 다닌 탓에 초등학교는 세 군데, 고등학교는 두 군데를 나왔다. 대학 때도 이사를 두 번이나 갔다. 오래전부터 스스로를 나그네 같은 삶이라 생각했다. 나그네와 같은 삶은 발걸음이 가벼워 내 성향과 다행스럽게도 잘 맞았지만, 가질 수 없는 것도 있었다. 단골집, 고향, 동네 같은 것.


적응할만하면 떠났고, 또 몇 년 살다가 동네가 좋아지기 시작하면 떠났던 것 같다. 불법적인(?) 이유는 아니었고, 먹고 살려다 보면 이건 뭐 별 것도 아니라는 걸 이제는 이해할 나이가 되었달까.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게 늘 싫지는 않았지만, 새로 사귄 애들이 단골집이나 자기 고향 같은 걸 얘기하면 좀 부럽기도 했다. 그건 어딘가에 마음을 붙였다는 얘기이기도 하니까.


취업을 하고 다시 이사를 했다. 이번엔 오랜만의 이사였다. 가족과 함께 살던 집을 나와 나만의 공간을 꾸렸다. 조금 외롭고 서툴렀지만, 홀로 무언가를 배워가고 이겨내는 재미도 쏠쏠했다. 누군가 세워 준 삶이 아니라, 이젠 내가 꾸려가는 삶. 새롭게 마음을 붙인 공간들도 생겼다. 벌써 이 집에서 2년 가까이 살고 있는데, 주말이면 책 한 권을 들고 좋아하는 공간으로 떠났다. 포근하기도 하고, 영감을 주기도 하는 공간.




첫 번째 공간 │ 앤트러사이트 서교점


우연히 알게 되었다. 옆에 있는 창비 카페에 자주 가다가, 알게 된 곳. 여느 카페와는 다르게 노래를 틀지 않는다. 대신 들려오는 사람들이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소리,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 잔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노래가 사라지니 사람의 움직임이 생생히 들렸다.


어두운 빛의 나무와 돌로 이루어진 곳. 이곳에서 나는 자주 책을 읽었다. 커피 값은 비싸지만, 이곳이 좋았다. 노래가 없어 좋았고 어두운 나무 빛이 있어 좋았으며 책 읽는 사람이 많아서 좋았다. 바처럼 생긴 1층 자리에 앉아 해가 질 때까지 문장을 읽다 보면, 멀리 있던 어둠이 건물 안까지 스며든다. 그 어둠이 차갑지 않아 좋았고, 창에 내 얼굴과 책 읽는 내 모습이 거울처럼 비치는 게 좋았다. 어둠도 차갑지 않을 수 있구나, 나무와 돌과 사람이 있는 창 안에서 늘 생각했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마음을 붙인 공간이다. 도시에 살다 보면 유독 많은 소음에 둘러 쌓여있단 생각을 한다. 새벽에 청소기를 돌리는 윗집, 친구들을 불러서 술을 마시고 떠드는 옆집 소리, 밖에서 들려오는 개조한 자동차의 굉음. 그리고 그 소음을 듣지 않기 귀해 내 귀에 꼽힌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가요들. 소음들은 삶에 자잘한 스트레스를 심었고, 일주일쯤 자잘한 가랑비를 맞고 서 있으면 옷은 홀딱 젖곤 했다.


그러다 만나게 된 공간. 주말이면 사람들이 자주 찾아 조금 시끄럽지만, 평일에 가면 아직 조용히 앉아있을 수 있다. 공간이 주는 힘이란 게 있구나, 처음 배운 공간이기도 했다. 더하기보단 빼기를 선택한 여백이 차갑지 않고 풍성할 수 있구나 생각한 공간이기도 하다.








두 번째 공간 │황인용 뮤직 스페이스 카메라타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공간이다. 선물처럼 생긴 금요일 오후에 떠난 곳. 파주 헤이리 마을에 숨어 있는 보석 같은 곳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새로운 세계에 온 것 같다. 이전의 세계는 잊어버릴 만큼, 다른 차원의 세계 같달까. 안쪽 한 벽면엔 1920년대 아날로그 스피커로 채워져 있다. 이 날은 오른쪽 스피커 단자 하나가 빠졌는지, 두 분이 나와 왼쪽과 오른쪽을 비교하며 스피커를 만졌다. 오래된 것들엔 누군가들의 시간이 담겨있다. 여기 계신 분들은 그 시간과 함께 한 분들일까.


가까이에 갈수록 심장이 쿵쿵 울렸다. 끊이지 않고 고전 클래식이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곡이 끊어지지 않도록 LP음반을 계속 틀어주셨다. 지하철과 버스, 사무실, 카페. 화상회의, 영상통화. 어디서든 이어폰을 달고 사는 현대인에게 큰 스피커로 클래식을 들을 일은 크게 없었다. 코로나 시대인 지금은 더더욱. 심장에 쿵쿵 진동이 올 만큼의 큰 음악 소리는 마치 바다에 푹 잠긴 느낌이 들었다. 아름답다. 해가 질 때까지 자리에 앉아 이름도 모를 작곡가들의 음악을 들었다. 고요하고 잔잔하면서도 웅장한 기분. 오랜만에 귀와 마음 모두 쉬는 듯했다.








세 번째 공간 │ 덕수궁


덕수궁은 앞의 두 공간과는 성질이 다르다. 열일곱 살 때부터 닳고 닳을 만큼 좋아했던 공간이니까. 덕수궁 뒤에 있는 학교를 다닌 덕에, 나의 등하굣길은 덕수궁 돌담길이었다. 전학을 가기 전까지 거의 매일 걷던 공간.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첫사랑을 잃었을 때도, 이곳에서 마음을 쉬곤 했다.


내 덕수궁 사랑은 오래 나를 지켜본 이들은 모두 알고 있다. '이 친구와 연락이 되지 않으면 덕수궁에 가면 찾을 수 있단' 말도 농담처럼 하곤 했으니까. 여기엔 나의 한 시절이 담겨 있다. 2년을 매일 오고 가며 걸었다. 걸으며 나는 덕수궁의 얼굴을 살폈다. 네 번의 계절이 성실하게 덕수궁을 스쳐가는 것을 보기도 했다. 봄에는 돌담길 너머로 벚꽃이 흩날리고, 여름엔 초록 초록한 잎들이, 가을엔 단풍이, 겨울엔 소복하게 하얀 옷을 입던 모습.


덕수궁 돌계단에 앉아 교복을 입고 많이도 울었다. 이사 가기 싫어서, 겨우 정든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떠나고 나서도 서울에 올 일이 생기면, 고향집 방문하듯 꼬박꼬박 오기도 했다. 공간에 마음을 심을 수 있다면, 내 마음은 이곳에 심어져있지 않을까 자주 생각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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