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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민 Nov 24. 2020

휴가 후, 복귀 하루 전날의 마음

사진을 마취 삼아 멍하니 사진을 본다.


늦가을 휴가를 다녀왔다. 아주 오랜만에 주어진 휴식이었다. 휴가를 가기 전까진 마음이 바빴는데, 막상 휴가를 간다고 생각하니 맥이 탁 풀리며 기뻤다. 쉬고 싶었구나, 나.     


사람이 많이 없는, 그래서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는 도시로 길을 정했다. 연말을 앞두고 회사의 시간은 평소보다 몇 배나 빠르게 흘렀고, 회사에 속한 나의 시간은 더 빠르게 움직여야 했지만, 남은 연차를 소진해야 했고 또.. 더 이상 힘을 내고 싶지 않았다.     



떠나니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심어지고 자란 도시는 그 사람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바다가 있었고 넓은 평야가 있었으며 산이 있었다. 푸르른 하늘은 덤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주 말했던 것처럼 그 도시는 시간이 천천히 흘렀고, 덕분에 늘 촉박하게 뛰던 내 마음도 잠시 천천히 걸었다. 사는 게 바빠 평소에 잘 보지 못하던 그와도 오래도록 걷고 먹고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마음에 뭉친 무언가가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     


하지만 시간은 성실히 흘렀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늦가을 휴가가 끝이 났다. 돌아오는 무궁화호 기차를 탈 때만 해도 크게 실감 나지 않았는데, 집 문을 딱 여는 순간 알았다.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걸. 조용한 도시에서 돌아오니 상대적으로 서울과 경기도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았고, 빼곡히 채워진 그들은 뭐가 그리 급한지 바쁘게도 걸었다. 용산역에서 내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우리 모두는 대체 어디로 걷고 있는 걸까. 또 무엇을 위해서.


집에 돌아와 가장 먼저 가방을 풀었다. 밀린 빨래를 하고 방바닥에 깔린 어지러운 물건들을 정리했다. 미뤄둔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문 앞에 쌓여있던 택배를 확인한 다음, 집을 비운 사이 도착한 지난 달 관리비를 이체했다.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일상이 다시 소리를 내니, 떠났다가 돌아온 건지 아님 이곳에 계속 있었던 건지 조금 헷갈렸으나, 핸드폰에 찍힌 수백 장의 사진을 보며, 아 나는 떠났다가 돌아온 거구나- 현실 감각을 되찾았다.     



집을 대강 정리하고, (그러면 안됐는데) 회사 메일을 열었다. 이상하게 오래 쉬면 불안해진다. 내가 쉬는 동안에도 일은 쉬지 않고 쌓이고 있겠구나, 복귀하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구나 하는 불안. 불안은 나를 메일을 열어보도록 이끌었고, 결국 나는 오전 반차만 쓰고 오후에 일하는 재택근무자로 복귀했다. 메일 몇 개를 쓰고 회신하니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여행 후유증은 업무 메일을 여는 걸로 바로 이겨냈고, 메일을 엶과 동시에 내일까지 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음을 깨달으며, 진정한 재택근무자로 변신했다.     


왜 메일을 열었냐고 묻는다면, 글쎄. 직장인이라면 이해해주지 않을까. 알 수 없는 불안, 부재중일 때 쌓인 업무의 양과 혹여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을까 하는 불안. 나 하나 없다고 회사에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만, 내가 담당하고 있는 도서들은 잠시 엄마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또 거기서 오는 불안. 내가 낳지도 않았으면서 이 이상한 책임감은 어디서 오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복합적인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휴가를 가기 전에도 바쁘고, 떠나서도 어느 한 구석은 불안하고, 돌아오면 더 바쁜 직장인의 삶. 복귀 하루 전, 컴퓨터 앞에 앉아 내일 해야 할 일을 셈해본다. 이것 먼저 하고 다음에 이걸 해야겠구나. 우선순위를 정하며, 일상 여행자 청민에서 직장인 청민으로 복귀한다. 언젠가 영원히 떠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가도, 그럴 수 없는 인생인 것 같으니 다시 떠날 날을 기다리며 주어진 오늘에 충실하자 싶고. 또 그러다가도 오늘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결국 밤 열한 시를 훌쩍 넘어 노트북을 닫고 침대에 눕는다. 핸드폰을 열어 아침 7시 반부터 알람을 10개나 설정한다. 그리곤 다리에 푹신한 베개를 끼고 옆으로 누워선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열어본다. 사진 속 나와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 걱정 없이 환하게 웃고 있다. 정말 즐거울 때 나오는, 나의 코 찡긋 버릇도 함께.     


사진을 마취 삼아 멍하니 사진을 본다. 늦은 밤, 가족 여행사진을 보던 아빠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몇 번이나 사진을 돌려보고 또 돌려보던 아빠의 마음도, 이런 거였을까. 살아간다는 건 무엇일까 하고 돌아보는 휴가 후, 복귀 하루 전날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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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민│淸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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