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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민 Sep 13. 2020

나를 아껴줘서 고마워

#13. 눈 속에서 따듯한 홍차 한잔을 마시는 기분이야.

띵동. 벨이 울렸다. 누구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묵직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택배입니다."


물건을 주문한 적이 없어 꽤 당황했지만, 문을 열었다. 우체부 아저씨는 나와 눈도 맞추지 않은 채, 그 택배박스를 나에게 날름 안기고 바로 돌아섰다. 느낌에 이건 번지를 잘못 찾은 것 같았다. 익숙한 박스가 아니었다. 요즘 쇼핑몰에서 박스를 독특하게 만든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낯선 박스의 출처는 그쪽이 아닌 것 같았다. 오랜만이지만 꽤 익숙한 문자들이 보였다.


"엥? 러시아..?"



러시아어가 바로 눈에 읽혔다. 러시아에서 날아온 택배였다. 주소를 읽어보니, 러시아 모스크바. 쓰인 주소를 읽으니 아! 그 애의 얼굴이 머리를 스쳤고, 동시에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내 생일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무더운 칠월, 파란 줄무늬 박스는 러시아에서 한국까지, 그 먼길을 온 것이다. 한여름의 무더위를 이겨 내고.


박스를 열었다. 어찌나 테이프를 많이 둘렀던지, 손으로 떼다가 칼을 가져와 뜯었다. 박스 속은 더했다. 무슨 신문 편집실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대체 신문지 몇 장을 넣은 거지? 러시아어가 잔뜩 쓰인 신문에, 순간 러시아로 교환학생을 다녀왔던 시절로 복귀한 것만 같았다. 너무 많은 포장에 혹 일부러 그랬는가 싶어, 그냥 냅다 박스를 뒤집어 러시아 편집국을 책상에 쏟아 냈다. 그러자 구겨진 신문지들 사이로 특정 모양을 가진 신문지들이 나타났다. 물건을 신문지로 싸고 싸고 또 싼 다음, 다른 신문지를 구겨 완충제로 사용했는데, 신문지가 한 3일 치는 되는 듯했다. 으이그.


박스에는 초상화 한 장, 시계 하나, 러시아 초콜릿이 들어있었다. 세상에. 그는 아르바트 거리에서 그린 초상화인 듯 했다. 거리의 화가들이 복작이는 러시아의 중심. 러시아에 있을 때 그릴까 말까 하다가 비싸서 두고 왔었는데. 바로 그에게 카톡을 보냈다.


'뭐야! 상상도 못 했어! 너무너무 고마워.'


그 사람은 바로 답장하지 못했다. 여긴 오후지만, 거긴 아직 아침이니까. 몇 시간 뒤에 그에게 답장이 왔다.

'도착했어? 에휴. 말하고 싶어 혼났네. 생일 축하해!'




깜짝 생일 선물을 보내기 위해, 그는 무더운 여름날 러시아 아르바트 거리에서 수많은 화가들의 그림을 살폈겠지. 아르바트 거리를 한 번 쭉 걸은 다음 고심 끝에 한 화가에게 그림 값을 물었겠지. 적당한 흥정을 한 다음, 내 사진을 건네고 그려달라 했을 테다.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옆에 서 있었다고 했으니, 아마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사진 속의 얼굴이 그림으로 옮겨질 때까지 기다렸을 테다.


살다 보면 오늘처럼 아름다운 날을 만날 때가 있다. 멀리서 와서가 아니라, 깊어서 아름다운 . 서프라이즈 선물을 마주할 때면 누군가 나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 한 구석이 따듯해진다. 저 사람에게 나는 어떤 모양 인가 문득 고민되는 시절, 러시아에서 날아온 소포를 받고 깨달았다. 그에게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걸.  한마디 없이 마음 하나로 충분했다.


아름다운 기억은 노력하지 아도 삶에 기록된다. 그들과의 결말이 어떻게 맺어졌든 상관없이, 순간에 쏟은 진심은 잔향처럼 오래 누군가의 삶에 남는다. 서로의 마음 하나로 충분했고, 마음 하나만 선물할 수 있었던 어리고 여렸던 시절. 우연히 그날들이 떠오르면 기억 속 그에게 이야기한다. 그 시절, 나를 아껴줘서 고마웠어. 네 덕에 눈 속에서 따듯한 홍차 한 잔을 마시는 기분이었어.



* 당시 친구가 보내준 초상화. 컬러풀한 게 마음에 쏙 든다. 2015년에 외장 하드를 깨 먹어서 유년의 사진이 다 유실되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날의 시간.





청민 Chungmin
* mail _ romanticgre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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