몹쓸 것들

by 낭만피셔

상담 중에 선생님이 이런 말을 건넸다. 지금 느끼는 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그 감정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 있는지 명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짙은 안개처럼 앞이 보이지 않던 내 마음을 헤쳐 나가는 데 꼭 필요한 등불 같은 이야기였다. 나의 내면은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 같아서 그 끝을 찾아야만 혼돈을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말을 길잡이 삼아서 나는 글쓰기라는 도구를 꺼내 들었다. 소란스러운 내 마음을 한 걸음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거리를 둠으로써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매일의 감정과 생각을 일기처럼 컴퓨터에 기록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기록들이 쌓이면 불규칙하던 마음의 흐름을 조금은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작은 기대를 품고. 파편처럼 흩어진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려는 듯이. 글쓰기는 단순히 기록하는 행위를 넘어서 나 자신을 탐색하고 이해하려는 절박한 시도였다.


하지만 매일 밤 키보드 앞에서 마음의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예상치 못한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들이 스스로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둡고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굳게 닫혔던 지하실 문을 열었을 때 뿜어져 나오는 축축하고 퀴퀴한 냄새처럼. 타인에게 선뜻 보여주기에 곤란한 지하실에 사는 몹쓸 것들이 그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들은 타인에게 보여줄 수 없는 종류의 마음이었다. 분노, 질투, 비참함, 끝없는 절망 같은 감정들. 그것들은 너무나 적나라해서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나의 치부였다.


그때부터 나는 보여주기 위한 글을 쓰기 위해 억지로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진짜 감정들을 감추고 타인이 받아들일 만한 긍정적이고, 일상적이며, 누구에게 보여주어도 괜찮을 만한 생각들을 애써 찾아냈다. 오늘의 날씨나 스쳐 지나간 고양이의 모습 같은 것들. 빈 공간을 그럴듯한 소품으로 채우듯이. 나의 글쓰기는 치유의 도구가 아니라, 완벽한 연극을 위한 대본이 되기 시작했다.


솔직한 나를 기록하기 위해 시작한 이 행위를 통해서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또 다른 나를 연기하고 있는걸까. 지금의 글쓰기는 나를 마주하는 거울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맞춘 가면을 만드는 과정이 되고 있다. 진정한 나의 모습은 글 속에서 점점 희미해지고 대신 꾸며진 나의 자아가 그 자리를 채워간다. 이 글쓰기의 끝에서 나는 누구를 만나게 될까. 진짜 나일까. 아니면 완벽하게 연기된 가짜 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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