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만의 재회. 그 자리에 앉은 건, 지금의 나였을까…
딸랑-.
오후의 정적을 깨는 청량한 풍경 소리가 들렸다. 창밖으로 무심히 시선을 던지던 지현은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며칠 전부터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누르던 예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카페 <바바블랙쉽>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남자. 16년 전의 기억 속 얼굴과 현재의 모습이 잠시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신윤섭이었다.
지현의 시간이 그 자리에서 순간 멈췄다. 맞은편에 앉은 친구 경진이 무슨 말을 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지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는 선명했다.
그 역시 창가에 앉은 지현을 발견하고 문 앞에서 그대로 우뚝 멈춰 섰다. 그의 눈동자가 아주 짧은 순간 놀람으로 커졌다가, 이내 가면을 쓰듯 빠르게 평정을 되찾는 것을 지현은 똑똑히 보았다. 그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고, 지현 역시 숨을 참고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뜨거워지는 얼굴을 감추려 테이블 위의 차가운 라떼 잔만 매만졌다. 온몸의 감각이 바짝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왔네.”
옆에서 경진이 낮게 숨을 삼키며 속삭였다. 그 목소리에는 놀람과 함께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
윤섭은 잠시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사장님과 짧게 인사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네요.” “네… 아이스 아메리카노…” 사장님이 “여전히 아메리카노고?” 하고 되묻는 소리도 희미하게 귓가를 스쳤다. 그는 커피를 받아들고, 지현의 테이블과는 가장 먼 대각선 방향의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일부러 거리를 두려는 의도가 명백하게 느껴졌다. 카페 안의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잔잔한 재즈 음악만이 태연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지현은 애써 태연한 척, 경진과의 대화에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등 뒤로 느껴지는 그의 기척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때였다.
쿵!
제법 큰 소리가 카페의 정적을 깨뜨렸다. 지현과 경진, 그리고 몇몇 손님들의 시선이 동시에 소리가 난 곳, 윤섭이 앉은 테이블로 향했다. 윤섭이 가방을 바닥에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이 목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허둥지둥 가방을 줍는 그의 모습.
그 순간, 이상하게도 지현의 얼어붙었던 마음 위로 다른 종류의 감정이 파문처럼 스쳤다. ‘저 사람도… 긴장했구나.’ 딱딱하게 굳었던 어깨에서 아주 미세하게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감정은 짧았다. 그녀는 다시 빠르게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윤섭은 겨우 가방을 옆 의자에 놓고 자리에 앉았지만, 더욱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사장님이 빈 컵을 치우는 척 테이블 사이를 지나 윤섭에게 다가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지현의 귓가에도 들릴 듯 말 듯한 사장님의 목소리.
“근데… 누구 만나러 오셨어요?”
심장이 다시 한번 쿵, 내려앉았다. 지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윤섭을 보았다. 그 역시 당황하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윤섭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장님은 그런 둘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고 돌아섰다.
“야. 어떻게 할 거야.”
옆에서 경진이 낮고 단호하게 속삭였다.
“지금 말 안 걸면 진짜 끝일 수도 있어.”
어떻게 하냐고. 지현은 여전히 답을 몰랐다. 가슴 속에서 뜨겁고 무거운 덩어리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경진과 사장님의 놀란 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지현은 출입구가 아닌, 카페 안쪽 화장실을 향해 걸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 도망치는 것도, 마주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걸음으로.
딸깍,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세상과 잠시 분리되었다. 차가운 세면대에 손을 짚고 거울 속 자신을 마주했다. 16년 만의 재회. 그리고 여전히 길을 잃은 스무 살의 자신이, 그 안에 속절없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