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처음 마주앉은 테이블 위에는..
2009년, 봄이었다.
햇살이 좋다는 말로는 부족한, 눈부신 5월의 어느 날 오후. 윤섭은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카페 바바블랙쉽> 앞을 서성였다. 새로 산 듯한 면바지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낡은 폴더폰 시각은 아직 10분이나 여유가 있었지만, 처음 가보는 동아리 모임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했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혹시 아는 얼굴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카페 유리창 너머로 젊은 사장님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만 보일 뿐, 한적한 골목은 고요했다.
그때, 골목 저편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카페를 찾는 듯한, 앳된 얼굴의 여자아이. 청바지에 흰 티셔츠, 어깨에는 에코백을 맨 평범한 모습이었지만, 햇살 아래 반짝이는 긴 머리카락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혹시. 저 아이도. 윤섭은 저도 모르게 먼저 시선을 보냈다.
그녀 역시 윤섭을 발견하고는 잠시 망설이는 듯 걸음을 멈췄다가, 이내 다가와 맑은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걸었다.
"저기... 여기 영화 동아리 모임 맞죠?"
갑작스러운 물음이었지만, 반가웠다. 윤섭은 살짝 놀란 표정을 감추며 약간 어색하게 대답했다.
"어, 맞을 거예요. 저도 지금 처음 와봐서요."
그녀가 싱긋 웃었다. 웃을 때 오른쪽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가는 것이 예쁘다고, 윤섭은 생각했다.
"아, 저도요. 저희가 제일 먼저 왔나 봐요?"
윤섭은 멋쩍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게요. 다른 분들은 아직... 저희 먼저 들어가서 자리 잡고 있을까요? 먼저 온 사람이 잡기로 했다고 들어서요."
"아, 네. 좋아요."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난 사이지만, 어색함 속에서도 왠지 모를 편안함이 있었다. 윤섭은 살짝 앞서 걸으며 카페 문을 열었다. 딸랑-. 맑은 방울 소리가 울렸다. 카운터 안의 사장님이 미소로 맞았다. "어서 오세요."
윤섭은 메뉴판을 보는 척하며 슬쩍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봤다. 그녀는 메뉴판을 꽤 진지하게 살피고 있었다. 동그란 눈, 오뚝한 코.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윤섭이 먼저 주문했다. 그녀도 메뉴판에서 눈을 떼고 말했다. "저는 따뜻한 카페라떼요."
계산을 하려 동시에 지갑을 꺼내려다 서로 멈칫, 어색한 눈맞춤. 공기 중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윤섭이 먼저 카드를 내밀었다.
"아, 제가... 같이 계산할게요."
"어? 아니에요. 괜찮은데요?"
"에이, 동아리 첫날인데요. 그냥 제가 살게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윤섭은 카드를 건네며 계산을 마쳤다. 사장님은 그런 둘을 보며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리 앉아 계시면 음료는 가져다드릴게요. 저기 창가 쪽 자리 비어있네요."
"네, 감사합니다." 윤섭과 지현은 가볍게 목례하고 창가 테이블로 향했다. 햇살이 잘 드는 자리였다.
마주 보고 앉으니 다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서로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메뉴판을 다시 보거나 창밖을 보았다. 그때 사장님이 주문한 음료를 가져다주었다.
"음료 나왔습니다. 천천히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대답하고 각자 음료를 한 모금씩 마셨다. 윤섭이 먼저 어색함을 깨려 그녀의 라떼 잔을 슬쩍 보며 존댓말로 물었다.
"혹시... 라떼 좋아하세요?"
그녀가 살짝 미소 지으며 역시 존댓말로 답했다.
"네. 아메리카노는 저한테 좀 써서요."
"아... 저는 단 건 잘 못 마셔서요..." 윤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 짧지만 이전보다 편안한, 웃음기 섞인 정적이 흘렀다. 윤섭이 다시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저기... 혹시 몇 학번이세요? 저는 09학번인데."
그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 진짜요? 저도 09학번이에요! 신입생."
그 말에 윤섭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안도감이 역력했다.
"와, 다행이다! 동기네. 그럼 우리 말 편하게 해도 되지? 아까부터 존댓말 쓰려니까 좀 어색해서."
지현도 그제야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편하게 하자."
드디어 딱딱했던 공기가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순간이었다. 윤섭이 자연스럽게 자신을 소개했다.
"난 신윤섭이야."
"난 김지현. 반가워, 윤섭아." 지현도 스스럼없이 이름을 불렀다.
윤섭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지현. 이름 예쁘다. 꼭 영화 속 주인공 이름 같은데?"
"오, 그래?" 지현이 웃으며 받아쳤다. "영화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혹시 특별히 좋아하는 영화 있어?"
"나는 보고 나서 좀 여운이 깊게 남는 거 좋아해. 예를 들면... '이터널 선샤인' 같은 거."
윤섭의 눈빛이 살짝 진지해졌다.
그 순간, 지현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어?! 너도?! 나도 그 영화 진짜 좋아해! 완전 인생 영화! 봤을 때 뭔가 머리가 띵하면서 멍해지더라."
윤섭의 얼굴에도 기쁨과 반가움이 가득 찼다. 자신과 같은 영화를, 같은 감정으로 좋아한다는 사람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맞아! 맞아! 그 느낌! 나는 특히 기억을 지워도 다시 사랑하게 된다는 게... 그게 되게 기억에 남더라고."
"어, 나도 그랬어! 그게 너무 좋았어. 기억보다 사랑이 더 먼저인 것 같은 느낌이라서."
지현이 깊이 공감하며 눈을 반짝였다.
"응. 나는 그런 식으로 영화 끝나고도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가 좋더라."
윤섭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현과 눈을 맞췄다.
서로의 눈 속에서 같은 종류의 반짝임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와, 나랑 취향 되게 비슷하네." 지현이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나 혼자 영화 많이 보는데 너한테 영화 추천 많이 받아야겠다."
"혼자 영화 보는 거 멋있는데?" 윤섭이 진심으로 말했다.
지현, 윤섭의 말에 살짝 놀라면서도 기분 좋은 듯 웃었다.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함은 완전히 사라지고, 서로에 대한 호감과 편안함, 그리고 막 시작된 설렘이 카페 안의 따뜻한 공기를 가득 채웠다. 창밖 햇살이 두 사람을 더욱 환하게 비췄다.
바로 그때였다. 카페 문이 조금은 요란하게 열리며 딸랑,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동시에 "야, 여기 맞지?", "오늘 뭐 보냐?" 하는 여러 명의 목소리와 웃음소리,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두 사람을 감싸던 조용하고 특별했던 공기가 순식간에 깨졌다. 윤섭과 지현은 소리가 나는 문 쪽으로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동아리 선배로 보이는 남학생 둘과 다른 신입생 둘이 웃으며 들어서고 있었다.
선배 중 한 명이 윤섭과 지현을 발견하고 손을 번쩍 흔들었다.
"어~ 먼저 와 있었네? 반가워요, 신입생들!"
선배 하나는 카운터로 가 사장님과 예약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이들은 안쪽 테이블로 향했다. 카페 안이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윤섭과 지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잠시 서로를 보았다. 방금 전까지의 둘만의 특별했던 공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지현이 작게, 약간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이제 진짜 모임 시작인가 보네."
윤섭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가 그들을 불렀다.
"오케이, 윤섭이, 지현이! 얼른 와서 앉아!"
두 사람은 약간 어색하게 서로 눈을 마주치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여러 사람 속에서 다시 느껴지는, 처음과는 다른 종류의 어색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