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걸어가는 밤길 위에서
영화 동아리의 첫 모임은 어색함과 설렘이 뒤섞인 채 끝났다. 조금은 들떠 있었고, 조금은 아쉬웠다. 시끌벅적했던 <카페 바바블랙쉽>을 나와 기숙사로 향하는 밤길은 낮과는 다른 고요함으로 가득했다. 노란 가로등 불빛만이 일정한 간격으로 길을 비추고 있었고, 발밑에는 봄바람에 떨어진 연분홍 벚꽃 잎들이 낮게 뒹굴었다. 선선한 밤공기가 뺨을 스쳤다.
낮 동안의 흥분은 가라앉았지만, 윤섭과 지현 사이에는 카페에서의 마지막 어색함과는 다른, 조금 더 깊어진 무언가가 흐르는 듯했다. 두 사람은 조금 전 동아리 방에서 나란히 걸어 나왔다. 옆에서 걷는 지현의 어깨가 가끔 스칠 듯 말 듯 가까웠다. 윤섭은 애써 앞만 보고 걸었지만, 온 신경은 옆의 지현에게 쏠려 있었다. 아까 '이터널 선샤인' 이야기를 할 때 반짝이던 그녀의 눈빛, 자신의 서툰 농담에 환하게 웃어주던 미소, 그리고 동기임을 확인했을 때의 안도감. 자꾸만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되감겼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까. 조금 전 동기들 앞에서보다 지금이 더 긴장되는 것 같았다. 심장이 괜히 빠르게 뛰었다.
그때, 윤섭의 머릿속에 불현듯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오늘 동아리 모임에서는 미처 꺼내지 못했던, 자신에게는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영화. 그녀의 취향이라면, 어쩌면 그녀도 좋아할지 모른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옆에서 걷는 지현을 바라봤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녀의 옆얼굴이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아, 지현아."
그가 걸음을 살짝 늦추며 불렀다. 지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호기심 어린 눈빛이었다.
"응?"
"갑자기 영화 하나 생각났어. 너한테 추천해주고 싶어서."
"어? 어떤 영화인데?" 그녀의 목소리에 작은 기대감이 실렸다.
윤섭은 진심을 담아, 그녀의 눈을 보며 또렷하게 말했다.
"'멋진 하루'."
"멋진 하루" 지현이 제목을 되뇌었다. 살짝 고개를 갸웃한다. "제목 좋다. 처음 들어보는데?"
윤섭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는 마치 자신이 이 영화의 홍보대사라도 된 것처럼 열정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 아마 모를 수도 있어. 엄청 유명한 영화는 아닌데... 되게 조용한 영화야. 하루 동안 헤어진 남녀가 같이 돈 갚으러 다니는 이야기인데, 그 과정에서 진짜 미묘한 감정들이 오가거든." 그는 허공에 손짓을 섞어가며 말을 이었다. "막 대놓고 보여주는 게 아니라, 대사 없이도 느껴지는 순간들? 그런 게 많아. 배우들 연기도 진짜 좋고."
지현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며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오... 그런 영화 좋아. 뭔가 잔잔한데 깊은 거. 나 그런 미묘한 분위기 좋아해."
윤섭은 그녀의 긍정적인 반응에 안심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네가 아까 '이터널 선샤인'처럼 여운 남는 거 좋아한다고 했잖아. 이건 진짜... 보고 나서도 계속 생각나. 하정우랑 전도연 배우..."
"알겠어!" 지현이 밝게 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메모 기능을 켰다. 당시 유행하던 폴더폰 액정 불빛에 그녀의 미소 띤 얼굴이 환하게 드러났다.
"'멋진 하루'. 꼭 찾아서 볼게. 메모 완료! 추천 고마워, 윤섭아."
윤섭은 지현이 메모하는 모습을 잠시 따뜻한 눈빛으로 지켜봤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진지한 눈빛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아주 살짝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혹시... 영화 보고 나서... 뭐, 이야기 나누고 싶거나 그러면... 나한테 연락해도 돼."
지현은 메모를 마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윤섭을 보았다. 그의 진지한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정말? 그럼, 나 영화 보고 꼭 연락할게."
그 명쾌한 대답에, 두 사람 사이에 마지막 남은 어색함마저 녹아내리는 듯했다.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어깨가 이전보다 더 가까워졌다. 멀리 보이던 기숙사의 불빛이 이제는 제법 선명했다. 봄밤의 공기 속을 가득 채우는 것은, 이제 막 시작되려는 풋풋한 설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