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윤섭의 12년이었다
스무 살, 설렘으로 가득했던 밤길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시간은 12년이라는 무게를 더해 다시 그 카페 안으로 윤섭을 데려다 놓았다. <카페 바바블랙쉽>. 오래전, 지현과 장난처럼 미래를 약속했던 바로 그 장소였다.
커피를 받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윤섭은 애써 태연한 척, 지현의 테이블에서 가장 먼 대각선 방향의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심장이 제멋대로 뛰어댔다. 김지현. 12년 만이었다. 정말 마주칠 줄이야.
그녀 옆에는… 경진이? 지현의 단짝 친구였던. 윤섭은 숨을 삼켰다. 그럼… 지현이도 약속 때문에 온 건가? 12년 전, 우리가 웃으며 했던 그 말을 기억하고? 경진이까지 데리고?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켰다. 말을 걸어야 했다. 오늘이 아니면, 어쩌면 영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오랜만이다’? ‘약속 기억하고 왔니’? 12년 만에 불쑥 나타나 건네기엔 너무나 어색하고 섣부른 말들. 게다가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떤가. 12년 전의 그녀가 알던 나와는 다른, 현실에 찌든 모습은 아닐까. 그녀는, 그리고 나를 기억할 경진이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애써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등 뒤로 느껴지는 두 사람의 존재감이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옭아매는 것 같았다.
옆 의자에 가방을 놓으려는데, 젠장. 긴장한 탓에 손에서 힘이 풀렸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순간 카페 안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지현과 경진의 놀란 눈과 마주쳤다. 윤섭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하필 지금! 얼마나 한심하게 보일까. 그는 황급히 가방을 주워 올렸다. 더욱 고개를 숙였다.
겨우 가방을 옆에 놓고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이미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떻게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할까.
그때, 사장님이 다가왔다. 빈 컵을 치우는 척 테이블 옆에 서더니, 그에게만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누구 만나러 오셨어요?”
윤섭은 숨을 멈췄다. 사장님까지… 눈치채신 건가? 혹시 지현이도 나처럼 약속 때문에 온 거냐고 넌지시 묻는 건가? 지현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윤섭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 역시 무리였어. 그녀가 약속 때문에 왔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설령 그렇다 해도, 지금의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에게 말을 건단 말인가. 12년 동안 나는 너무 많이 변했고, 그녀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책임져야 할 현실의 무게뿐인데. 말을 걸었다가 그녀가 ‘누구세요?’ 혹은 ‘무슨 약속?’ 하고 되묻는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더 비참해지기 전에 떠나야 했다.
윤섭은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조용히 가방을 챙겨 어깨에 멨다. 의자를 뒤로 뺄 때는 아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온 신경을 집중했다. 출입문을 향해 걸었다. 문 앞에서, 아주 잠깐. 12년 전의 약속과 오늘의 만남이 그의 발목을 잡는 듯했지만, 그는 망설임을 뿌리치듯 문을 열고 카페를 나섰다.
딸랑-.
등 뒤에서 방울 소리가 들렸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차가운 오후의 공기가 뜨거워진 뺨에 와닿았다. 안도감보다는 깊은 자괴감과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12년 만의 재회는,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바보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