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못 걸어서 아쉬웠고
화장실 문이 닫히자마자 지현은 차가운 세면대에 양손을 짚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좁은 공간을 가득 메우는 듯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12년 만의 신윤섭. 그가 정말 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도망치듯 이곳으로 와버린 걸까.
‘그 바보 같은 약속, 나만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야, 윤섭이도 분명… 가방 떨어뜨릴 만큼 긴장했었잖아.’
윤섭이는 왜 그냥 갔을까. 나를 알아보지 못한 걸까? 아니면 모르는 척한 걸까? 사장님의 질문에 그는 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을까. 수많은 질문들이 엉켜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지현은 찬물로 얼굴을 세게 한번 씻어냈다. 정신 차리자. 하지만 차가운 물줄기에도 뜨거워진 뺨과 어지러운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심호흡을 몇 번 하고 헝클어진 앞머리를 정리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주문처럼 되뇌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천천히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카페 안은 아까보다 더 조용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윤섭이 앉아있던 대각선 건너편 테이블은 비어 있었다. 텅 빈 의자. 그 당연한 사실이 왜 이렇게 심장을 서늘하게 만드는지. 시야가 살짝 흐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지현은 천천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경진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현은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괜찮아? 너 얼굴 완전 하얘.” 경진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지현은 고개를 저었다. “몰라. 나 진짜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목소리가 겨우 나왔지만 작게 갈라졌다. 바보같이 도망이나 치고. 말을 걸어볼 용기도 없었으면서.
“그러게. 말이라도 걸어보지 그랬어.” 경진이 안타까워했다. “아니면 신윤섭 걔는 또 왜 그냥 가는데? 너 여기 있는 거 뻔히 봤을 거 아니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지현은 속으로 쏘아붙였다. 겉으로는 그저 식어버린 라떼 잔의 표면만 손톱으로 긁었다.
“나도 몰라… 아까 사장님이 누구 만나러 왔냐고 물어보니까 대답도 못 하고 그냥 가버리던데.”
경진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건데? 이걸로 진짜 끝이야?”
‘끝? 시작도 못 했는데?’ 지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를 본 반가움, 말을 걸지 못한 아쉬움, 그가 떠나버린 것에 대한 알 수 없는 서운함, 그리고 그가 긴장했다는 사실에 대한 아주 약간의 안도감까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떤 길도 보이지 않았다.
“…모르겠어.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직도 정신이 하나도 없어. 머리가 아파.”
경진은 그런 지현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여기서 이러지 말고 가자.”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가방을 챙겨 먼저 일어섰다.
지현도 로봇처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이블 위에 남겨진, 거의 그대로인 라떼 잔. 수많은 말들과 감정들이 차마 전해지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남겨진 듯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윤섭이 앉았던 빈 의자를 한번 힐끗 돌아보았다. 미련인지 확인인지 모를, 복잡한 시선이었다. 그리고 경진을 따라 카페 문을 나섰다.
딸랑-. 다시 한번 방울 소리가 울렸다. 어둑해진 골목길을 걸어가는 지현의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12년 만의 재회는 이렇게,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 채, 가슴에 무거운 물음표만 잔뜩 남긴 채 끝나버리는 걸까. 마음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파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