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 맑은 소리가 울렸다
늦은 저녁, 조명이 어둑한 작은 술집 구석 자리. 지현과 경진은 맥주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거의 비어가는 감자튀김 접시가 놓여 있었다. 낮 동안의 소란스러움이 남긴 잔해처럼, 지현의 마음 역시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런 지현의 빈 잔에 경진이 맥주를 채워주며, 기다렸다는 듯이, 하지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오늘 카페에서 윤섭이 만나니까 어땠어?”
지현은 친구의 직접적인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이, 혹은 올 것이 왔다는 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복잡한 감정을.
“…몰라. 좋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그냥… 너무 복잡했어.”
경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현의 과거를, 그 상처를 알고 있었다.
“그럴 수 있지. 12년 만인데.” 경진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도 걔도 너 보러 나온 거 아니야? 그 약속 기억하고?”
지현은 대답 대신 술을 한 모금 넘겼다. 차가운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갔지만,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 보고 싶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의 얼굴을 보니 12년의 시간과 함께 묻어두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보고 싶었지. 보고 싶었는데… 막상 보니까 다시 얽히는 건… 좀 무섭더라. 자신이 없어.”
그녀는 힘없이 웃었다.
“나 이성훈 그 자식 일 겪고 나서 그냥 겁쟁이 된 거 알잖아. 믿었던 만큼 발등 찍히는 거…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아. 다시 누군가한테 마음 주고, 기대하고… 그러다 또 그렇게 산산조각 날까 봐… 솔직히 말해서, 다시 시작할 용기가 없어. 윤섭이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내가…”
그녀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떨렸다. 그때의 배신감과 절망감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듯했다.
경진은 지현의 손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그녀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잠시 침묵했지만, 이내 답답하다는 듯, 그러나 친구를 위하는 진심을 담아 말을 이었다.
“…그래, 네 마음 알아. 아는데… 지현아.”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도 평생 혼자 살 거 아니면, 언제까지 그렇게 겁만 내고 있을 건데? 언젠가는 용기 내야지. 상처 무서워서 연애 안 하면, 그냥 쭉 혼자인 거야.”
경진은 잠시 숨을 골랐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너 그동안 만났던 남자들 중에… 나는 신윤섭 걔가 제일 괜찮았어, 옛날부터. 네가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내 눈엔 그랬어. 서툴러도 진심은 있었잖아.”
그녀는 낮의 카페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 카페에서 너네 둘 그러는 거 보는데 내가 다 숨 막히더라! 12년 만에 약속 기억하고 나타난 서로 앞에서 말 한마디 못 하고!”
지현은 친구의 날 선 말들에 움찔했지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술잔만 내려다보았다. 윤섭이 괜찮았다고? 진심이었다고? 기억조차 희미한 과거였다. 그런데… 아까 그가 가방을 떨어뜨리며 당황하던 모습은 왜 자꾸 떠오르는 걸까.
“…모르겠어. 근데… 아까… 걔 엄청 긴장한 거 보니까… 이상하게 마음이 좀 놓이긴 했어.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싶어서 그랬나 봐.”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경진은 잠시 말이 없다가, 끄덕였다.
“그래. 그런 느낌, 쉬운 거 아니지.”
그녀는 잔을 들었다.
“휴… 아무튼. 네가 결정해. 계속 겁나서 이대로 또 놓칠 건지, 아니면 그 아쉬운 마음 붙잡고 이번엔 조금 용기 내볼 건지. 진짜 좋은 사람… 그렇게 쉽게 오는 거 아니다?”
경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지현은 친구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담긴 걱정과 응원을 읽었다.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잔을 들어 경진의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쨍, 맑은 소리가 울렸다. 눈을 감았다 뜨며, 희미하지만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확신은 없었지만, 아주 작은 용기의 씨앗이 마음 한구석에서 싹트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