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5월 24일 10화

9화 : 12년 만의 메시지

12년의 정적을 깼다

by 낭만피셔

아침의 햇살이 통유리창을 길게 통과해 제작사 사무실 바닥에 나른한 사각형을 그리고 있었다. 윤섭은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모니터에는 그가 프로듀싱을 맡은 드라마의 2회차 수정고가 떠 있었다.


[기억을 지운 연인들이 운명처럼 다시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로그라인은 그럴싸했지만, 어쩐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다. 몇 시간째 같은 페이지, 주인공 남녀가 재회하는 장면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들의 대사는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좀처럼 활자로 구체화되지 않았다. 손은 키보드 위에 있었지만, 정신은 자꾸만 며칠 전 <카페 바바블랙쉽>의 풍경을 향해 달아났다.


‘…오랜만이네요.’ 덤덤했지만 무언가 알고 있는 듯했던 사장님의 목소리. 놀란 듯, 혹은 외면하듯 휙 고개를 돌리던 지현의 옆얼굴.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지던 자신의 가방과 그 소리에 놀라던 그녀의 눈동자. ‘누구 만나러 오셨어요?’ 마치 심장을 꿰뚫어 보는 듯했던 사장님의 질문 뒤에 짧게 마주쳤던 그녀의 시선.


윤섭은 마른세수를 했다. 집중해야 했다. 팀장의 마감 독촉 메시지가 아침부터 메신저 창 한구석에서 그를 재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12년 만에 마주친 과거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현재를 흔들고 있었다. 기억을 지운 연인들? 그는 기억을 지우지 못했다. 다만 애써 외면하고, 다른 기억들로 덮어왔을 뿐이었다. 그는 모니터 속 주인공에게, 그가 느끼는 감정의 백 분의 일도 제대로 불어넣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사무실 입구 쪽에서 짧은 박수 소리와 함께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출근한 정하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새로운 인턴인가, 신입인가. 윤섭은 잠시 소리가 난 쪽을 무심하게 보았다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새로운 사람이 오든 말든, 지금 그에게는 마감 독촉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그녀, 김지현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점심시간, 윤섭은 구내식당 구석 테이블에 혼자 자리를 잡았다. 밥알을 세듯 느릿하게 숟가락을 움직이는데, 아침에 인사했던 신입사원, 정하늘이 식판을 들고 그의 앞에 섰다.


“선배님, 여기 앉아도 괜찮을까요?” 하늘이 씩씩하게 물었다.


윤섭은 잠시 망설였지만, 거절할 이유도 없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윤섭이 먼저 물었다.


“하늘 씨는 영화 좋아하세요? 우리 회사 지원한 거 보면…”


그 말에 하늘의 얼굴에 즉시 화색이 돌았다.


“네! 정말 좋아해요! 영화 때문에 여기 지원한 걸요! 최근에 ‘멋진 하루’ 재개봉한 거 봤는데, 혹시 보셨어요? 너무 좋더라고요.”


‘멋진 하루’.


그 네 글자가 그의 귓가를 때렸다. 젓가락질이 멈췄다. 그의 모든 사고가 잠시 정지된 듯했다. 심장이 다시 쿵, 하고 내려앉았다. 12년 전, 자신이 지현에게 그토록 열정적으로 추천했던 영화. 그녀가 ‘진짜 좋았다’고, ‘네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겠다’고 답장을 보내왔을 때 세상을 다 가졌던 기분. 그 영화의 제목을, 지금 여기서 듣게 될 줄이야.


하늘은 아무것도 모른 채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저 완전 처음 봤는데, 되게 잔잔한데도… 보고 나서 계속 생각나더라고요. 그냥, 하루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남는 느낌? 선배님도 보셨어요?”


윤섭은 하늘의 해맑은 질문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 스치는 미세한 파문을 애써 감추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영화… 저도 좋아합니다.”


그는 감정을 누르고 담담하게 덧붙였다.


“…오래전에 봤는데… 저한테도… 꽤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던 기억이 나네요.”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지만, 밥맛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멋진 하루’. 그 영화 제목 하나가 그의 마음속 둑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지현의 얼굴이, 목소리가, 웃음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온통 헤집어 놓았다. 오늘 밤에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으리라.


결국 그날 밤, 윤섭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불 꺼진 거실, 스탠드 조명만이 희미하게 켜진 공간. 그는 소파에 앉아 어둠 속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낮 동안 그를 괴롭혔던 ‘멋진 하루’의 잔상, 그리고 그 끝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지현의 얼굴.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망설임 없이 인스타그램 DM 창을 열었다. ‘김지현’. 하얀 입력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천천히,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단호함으로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지현아, 나 윤섭이야. 잘 지내?

오늘 회사 후배가 ‘멋진 하루’ 얘기하는 거 듣는데 문득 네 생각이 나더라.

우리 옛날에 그 영화 좋아했잖아.

...시간 괜찮으면 언제 커피라도 한잔 할까?


마지막 물음표를 찍고, 그는 ‘전송’ 버튼 위에서 아주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눌렀다.

‘띵’. 짧고 선명한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메시지는 보내졌다. 12년 만의 연락이었다. 그는 화면이 꺼진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후련함과 동시에 밀려오는 엄청난 불안감.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의 표정에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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