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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마언니 Apr 12. 2020

지금 나는 취중입니다

단유 했습니다



한국에 살 적에도 나는 꽤 애주가였는데 이탈리아에서 살아가다 보니 점진적 애주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 식사에 와인이 빠지면 섭섭하고 식사 전에는 아페르티보 (식전 주)를 마시고 늘 일상 속에서도 와인은 빠지지 않았건만 임신과 출산을 거듭하면서 일종의 삶의 낙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생활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렸다

첫 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만 해도 8년 만에 기도로써 겨우 갖은 아이라 너무나 감사한 마음에 덜했다 하더라도 출산 후 모유 수유하는 기간이 더없이 힘들었다. 수유만 끝나면 가봐야지 하면서 와이너리 리스트까지 만들어두었고 정말 수유가 끝나던 날 우린 와인투어를 떠났다.



그렇게 다시 내 삶의 재미를 찾는가 싶을 때쯤 둘째가 찾아왔다.

10개월의 임신기간 중 와인 한 잔 너무나 간절한 순간순간이 있었고 비록 '나'는 참지 못했지만 '엄마'는 고비고비를 참아냈다.

이탈리아에서는 와인 한 잔의 알콜 정도는 임산부의 혈액순환에도 도움이 된다고도 한다.

심지어 너무나 궁금해 담당 의사에게 물었을 때도 와인 한 잔정도는 큰 문제없다는 답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흔들리는 '나'와 '엄마'의 갈등 속에서 매번 엄마의 완승이었다

그렇게 임신 10개월 견뎌냈다.


출산만 하면 마치 끝날 것 같았건만 되려 출산 후가 더 힘들었다

내가 섭취한 음식에 따라 내 아이의 식단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니 어느 하나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당연스레 첫 돌, 12개월까지 모유수유해야 한다 생각했건만, 뜻하지 않은 건강상의 문제로 첫째 수유를 7개월에서 그쳤다. 하루아침에 모유를 단박에 끊어내야 했음에도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모유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고 분유에 제법 적응을 잘해주었다. 건강상의 문제였기에 큰 탈 없이 잘 넘어가 준 그 시간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둘째 역시 6개월이 지나면 모유를 차츰 끊어야지 생각했는데 웬걸, 분유 수유는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기겁을 하는 거다

100일이 갓 넘었을 때부터 차츰 연습을 했건만 불가능했다.

애초 예상했던 6개월은 처참히 무너졌고 대체 왜 분유를 안 먹니! 타박을 하면서도 모유수유를 지속해나갔다

7개월이 되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모유로 유인하고 분유가 가득 든 젖병으로 바꿔치기했다

잠결이었던지 포기를 한 건지 꿀떡꿀떡 잘만 먹는, 줄어드는 젖병 속의 분유를 보니 그동안 분유 탓인가 젖병 탓인가 하며 무한정 바꿔보았던 그동안의 일들이 새삼 아무런 효능이 없었다 느껴지는 허탈함이었다

물론 그날 그때 이후 다시금 모유 러버가 되긴 했지만 종종 거부감 없이 분유 또한 먹어주니 실낱같은 희망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점진적인 연습의 결과일까 8개월에 들어서서는 모유 대비 분유 수유 비중이 현저히 많아졌다.

그러다 어느 날은 완벽히 모유를 거부하는 날이 생겼다


이 날을 기다렸다

드디어 내게도 이 날이 온 것이다


한데 너무나 손꼽아 기다렸던 날이건만 기분이 너무 우울? 섭섭? 한거다 

아이가 있는 엄마라면 누구나 경험해보았을 단유의 허전함

너무나 기다렸던 순간이지만 수유를 통해 그동안 아이와 나, 단 둘이서만 나누던 그 교감 역시 너무나 행복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이라는 걸 말이다 

그 시간을 (물론 분유 수유 또한 마찬가지로 교감이 충분하지만) 잃었다 생각하니 그 날은 하루 종일 알 수 없는 멍 함의 시간이었다

젖병만 들이대면 밀쳐내고 기겁을 하던 아이는 그렇게 아이 스스로 완벽하게 모유수유를 끊어냈고, 나는 수유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리고 오늘 꿈에도 그리던 와인 병을 열었다


이번에도 수유만 끝나면 해야지 했던 수많은 리스트가 존재했지만 망할 코로나 바이러스 덕분에 집에만 있게 된 현실 속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그동안 사 모았던 와인 여는 행위

이 마저도 미치게 감사한 순간


은은하면서도 달콤한 코 끝의 향과 부드러우면서 복합적인 풍미들이 어우러지고 목 넘김 후 기분 좋은 과실 향이 길게 맴도는 그러면서 마지막에 조여 오는 혀 끝의 짜릿함

창 밖으로 불어오는 살랑이는 봄바람까지 그저 완벽한 거다


홀로 심취하여 반 병을 음미할 즈음 한 잔 가득 따른 와인 잔을 들고 컴퓨터 앞으로 자리를 옮긴다

장장 18개월 동안 너무나 하고 싶었던 그것

글 쓰면서 마시는 와인 한 잔


온몸, 손가락 마디 끝까지 퍼지는 알콜의 짜릿함

지금 그 꿈같은 시간을 나는 만끽 중이다

지금 나는 취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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