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숙명
오랜만에 함께 일했던 후배들을 만나 운동을 했다. 이십 년 가까이 같은 회사에서 일했지만 지금은 다른 대기업의 임원 생활을 마치고 모두 굳건하게 자기 길을 개척해 가고 있는 믿음직하고 든든한 후배들이다. 함께 해외 비즈니스를 하면서 뉴욕으로, 밀라노로, 파리로 많이도 함께 돌아다녔었다. 일주일 전후의 해외 출장이지만 매일 아침, 점심, 저녁을 함께 챙겨 먹고 생활하다 보면 회사의 선후배가 아니라 가족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업계에 소문난 잘난 후배인지라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를 많아 받는다. 아무래도 그 화려한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다. 직급도 올려주고 연봉도 훨씬 더 많이 준다고 하면 초심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럴 때 마침 회사로부터 대우를 제대로 못 받는다고 느낀다거나 또는 상사와의 갈등이 생길 때라면 울고 싶은데 빰 때려주는 격이 된다. 아무리 붙잡고 싶어도 체계화된 승진제도와 인사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좋은 기업은 그렇다고 해서 무리하게 인사 시스템을 벗어난 대우로 그를 붙잡을 수는 없다. 그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고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 친구와 회사의 인연이 딱 거기까지라고 볼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또한 자연의 이치처럼 그래야만 묵묵히 일하며 큰 꿈을 품고 초심을 지킨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서 운동하고 점심을 먹으며 옛날 함께 출장 다니던 얘기를 하며 옛 추억을 소환했다. 한 친구는 옮겨간 대기업을 그만두고 이제 자신의 경험과 핵심 역량을 살려 그 자신의 해외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업하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우연히 카페에서 점을 보게 되었다는 얘기와 함께, 점쟁이가 말하기를 자신은 특별히 어렵게 일하지 않아도 평생 놀고먹을 운명이라고 말했다며 웃는다.
함께 점을 같이 본 동료는 열심히 일한 만큼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며 놀린다. 열심히 일한 만큼 성공할 수 있는 한치의 에누리도 없는 박복한 운명은 나와 닮았다고 생각하며 그 부연 설명이 궁금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평생 놀고먹을 운명이라는 그 점괘가 부럽고 궁금해서 추가 질문을 했다. 지금 시작하는 사업이 대박을 터뜨려서 큰돈을 벌고 그 이후엔 설렁설렁 일해도 될 운명을 뜻하는 것 같다고 축언을 더해주었다.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나는 살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벤트 행사에서 행운권 추첨이나 복권 당첨이 된 적이 없었다. 반면 아내는 유사한 경우에 반드시 당첨이 된다. 함께 식당이나 가게에 갈 때는 손님이 없다가도 갑자기 손님이 몰려오는 경험을 할 때가 많다. 가끔 아내는 나한테 내가 열심히 일한 만큼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딱 그만큼만 먹고 살 팔자라며 운명이라고 놀리기까지 한다.
지금까지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의 그 후의 삶을 추적한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는데 단 한 사람도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이 없고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한 것을 보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정말 사랑하신다고 확신을 갖게 되었다. 어린아이가 칼을 갖고 놀겠다며 아무리 울며 불며 보채도 엄마라면 절대로 칼을 주지 않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내게 그 위험한 로또를 당첨되게 해 주실 리가 만무하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난 언젠가부터 로또의 행운을 단념하고 그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쓰러질 때까지 일한 적도 있었다.
언젠가 새벽에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 응급실로 향하는 생사의 기로에서 정신줄을 놓을 수가 없었다. 평생 일만 하다 이렇게 생을 끝내기엔 너무 억울한 생각이 들었고 운명은 다시 나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지금도 미련을 못 버리고 언젠가는 대운을 지닌 아내를 설득해서 로또 명당이라는 잠실역 8번 출구 키오스크에서 전액 기부해 버린 재난지원금만큼 로또를 사서 아내의 행운과 운명에 기대볼 깜찍한(?) 마지막 희망을 아직 못 버리고 있다.
물론 아내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가끔 회사 다니기 싫을 때마다 내가 그 로또 명당 얘기를 꺼내면 정색을 하고 싫은 티를 내왔기 때문이다. 아마도 어설프게 무술을 연마한 친구들이 힘자랑을 하는 것처럼 아내는 무림의 고수처럼 섣불리 아무 때나 나서지 않는 그런 내공의 경우인 것 같다고 생각하니 더 믿음을 갖게 된다. 항상 잠실역 8번 출구를 바라볼 때면 내가 아내의 이름으로 산 로또 1등 당첨이 하나 더 추가되어 12회 1등 당첨이 나온 키오스크가 될 그런 운명의 날을 꿈꾼다. 그러나 아내 이름으로 로또를 사게 하는 것이 1등 당첨만큼이나 어려운 현실을 알기에 그냥 삶이 힘들 때마다 한 번씩 상상해 보며 힐링하고 있다.
그럼 우리들의 삶을 결정하는 운명과 숙명은 어떻게 다른 걸까. 운명은 내 얼굴의 정면에서 돌멩이가 날아오는 것이고, 숙명은 내 등 뒤에서 돌멩이가 날아오는 것과 같다고 한다. 운명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나의 중심을 잡고 지혜롭게 대응하면, 비록 운명이라 할지라도 돌멩이를 피할 수 있는 것처럼 쉽게 체념하지 말고 우리의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태도에 따라 굳은 의지와 함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바꾸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운명이 우리를 이끄는 곳으로 막연히 따라가지 말고.
하지만, 문제는 숙명이라면 저항하지도 반항하지도 말고 이미 정해진 자연의 이치에 따라 순순히 받아들여야 고통을 줄일 수 있다. 등 뒤에서 날아오는 돌멩이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발버둥 치면 발버둥 칠수록 삶이 더더욱 늪에 빠진 것처럼 점점 힘들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