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훈과 슬로건
햇볕이 좋아서 꽃고추, 시클라멘, 꽃배추를 거실 창가에 옮겨 놓았다. 비록 아파트 거실이지만 모두 추운 겨울, 삼 개월 이상을 함께한 반려식물들이다. 꽃고추는 지난해 여름 양재동에 있는 청계산 옥녀봉을 등산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양재동 꽃상가에서 사 왔으니 벌써 반년 이상을 함께 살면서 함박눈 같은 하얀 꽃과 무수한 빨간 열매를 두 번이나 맺고, 또 하얀 꽃을 준비하고 있다. 새빨간 꽃을 두 번째 피워내고 있는 시클라멘과 꽃배추 역시 지난겨울 초입에 사 왔으니 기대 이상으로 오래 살고 있다.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닐 때 어느 날, 학교에서 가훈을 부모님께 여쭈어보고 적어오라는 숙제를 받아왔다.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느라 한창 바쁜 아내에게 우리 집 가훈이 뭐냐고 아이가 물어보면서 요리를 하고 있던 아내의 집중력을 흩뜨려 놓았다. 아내는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나를 가리키며 아이에게 가훈은 아빠에게 물어보라며 아이를 내게 보냈다.
한창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보며 집중하고 있던 나는 아이에게 누군가에게 들었던 조크를 가훈으로 말하며 그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했다.
“꽃을 꺽지 말자”
“개미를 죽이지 말자”
“잔디를 밟지 말자”
물론 내 얘기를 모두 듣고 난 아이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선뜻 그 세 가지 가훈 예비후보들 중에서 고르지 않았고, 내게 불만 섞인 말로 그의 생각을 얘기했다. 다른 친구들은 “최선을 다하자” “ 정직” “성실” 같은 거라고 하는데 아빠가 말한 가훈은 고를 게 없다고 컴플레인했다. 그래도 그중 아이가 ‘꽃을 꺽지 말자’에 관심을 보이는듯해서 TV에 집중하고 있던 나는 바로 순발력 있게 그럼 “나무를 사랑하자”로 하자고 해서 아이와 타협을 하고 숙제를 끝냈다.
다음날 학교를 다녀온 아이의 숙제 노트에는 동그라미가 세 개밖에 없었고 그 밑엔 선생님의 ‘당부의 말씀’이 적혀 있었다.
너무 오래된 얘기라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 후로 아빠에 대한 아이의 신뢰는 무너졌고 나는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했다. 다시 그 숙제 노트인지, 가정통신문인지 우리 아이 선생님의 정중한 당부의 글에 답신을 적어 내려갔다.
“존경하는 선생님께, 아이들의 교육에 불철주야 사랑과 관심으로 수고하시는 선생님께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제 아이가 숙제로 써간 가훈 ”나무를 사랑하자”는 절대로 숙제를 안 해간 우리 아이가 스스로 만든 가훈이 아닙니다. 나무를 사랑하는 아이가 이웃에게 폐를 끼칠 수 없고, 나무나 난초를 키워보신 분은 알겠지만 물 주는 것 배우기만 삼 년이라고 성실하지 않으면 규칙적으로 물을 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환경 문제가 심각한 만큼 요즘 트렌드에 어울리는 가훈이라고 생각합니다. 가훈도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정해주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알기 쉽고 실천하기 쉬운 가훈을 만들려다 보니 선생님께 혼란를 주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심사숙고 끝에 이렇게 아이의 숙제 노트에 답신을 적어 보냈고 다음날 아이의 숙제 노트에는 못다 그린 동그라미 두 개가 더 추가되어 다섯 개로 그려왔음은 물론이었다. 사실 나는 어릴 때 우리 집 가훈인 ‘성실과 근면’ 같은 추상적인 말이 너무 싫었다. 국가에 헌신하고 있던 아버지는 성실과 근면이야말로 그 시대 최고의 가치이고 덕목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나는 누가 가훈을 물어볼 때면 ‘성실과 근면’이라고 말은 했지만, 머리로 이해는 했어도 사실 무슨 뜻인지 깨닫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 뜻을 알기까지는 어른이 되고 직장 생활을 한 십 년쯤 하고 나서야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 ‘존버 정신’이 필요한 직장생활에서 ‘성실과 근면’은 다른 말로 ‘은근과 끈기’였기 때문이다.
가훈에 대해 평소에 그런 생각이 있어서인지 나는 그 반항으로 언젠가 가훈을 짓게 되면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쉽게 짓고 평소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그렇게 가훈을 짓게 만들지 않았나 합리화하고 싶다. 물론 그 가훈, ‘나무를 사랑하자’ 이후로 우리 가족은 모두 나무를 사랑하게 되었고, 함부로 꽃을 꺾은 일도 없고, 공원 잔디밭에는 들어가지도 않는다.
회사 생활에서도 사무실에 있는 나무나 화초에 물을 안 줘서 말려 죽이는 걸 참지 못했고, 어떤 장소나 유명한 곳을 방문해도 그곳의 멋진 나무로 기억했다. 그리고 아무리 훌륭한 건축물도 그 옆에 서있는 나무 한 그루만 못하다는 말에 동의한다.
누구나 스스로 소중히 생각하는 가치들이 있다. 그 가치들은 반드시 무슨 거창한 구호일 필요도 없고, 또한 무슨 추상적인 고상한 낱말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런 가치를 그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그들이 하는 행동과 신념으로 현실의 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정이나 기업이든, 올림픽이든, 새로운 정부든 그들이 소중히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들이 내세우는 소중한 가치를 표현하는 많은 구호와 슬로건들이 있어왔다.
“정의사회의 구현” “보통 사람의 시대” “역사 바로 세우기” “제2의 건국, 햇볕정책” “사람 사는 세상” “녹색 성장” “창조경제, 통일 대박”. 돌이켜 보면 집권 내내 그들이 가장 이루고 싶은 좋은 생각, 좋은 말의 소중한 가치들이었지만, 그 결과는 대개 그 반대로 나온 이유가 뭔지 한번 돌아봐야 할 것이다.
가훈이든 슬로건이든 제일 중요한 것은 좋은 생각, 좋은 말 잔치가 아니라 그 구성원 모두가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하며, 그 구성원 모두가, 또는 사회적 합의가 우선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카카오톡이 우리의 생활이 되고 나서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친구나 지인들이 좋은 말이나 좋은 글을 보내온다. 미안하지만, 특별한 내용이 아니면 잘 읽지 않는다. 심지어 팩트 확인 없이 가짜 뉴스까지 분별없이 보내오는 경우가 많다. 나이가 오십을 넘으면 “누가 이런 말을 했네, 누가 저렇게 살았네” 하는 말에 휘둘릴 나이는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서 지금까지 이렇게, 저렇게 잘못 살아왔다고 변명하기에는 부끄러운 나이고, 단지 후회보다는 반성이 필요한 나이일 뿐이다. 좋은 말과 좋은 글도 좋지만 정보의 홍수 속에서 머리로만 살지 말고, “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해 ”하고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인생의 주인으로, 가슴으로 살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