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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Apr 11. 2021

서둘지 마라, 그러나 쉬지도 마라

관계 맺기


 주말 오후, 우연히 영화채널을 돌리다가 발견한 ‘중경삼림’(1995, 왕가위 감독)을 다시 보았다. 홍콩 경찰 금성무와 마약 밀매상 임청하의 관계 맺기를 다룬 전반부와 경찰 663의 양조위와 패스트푸드점 왕페이의 사랑 이야기를 보면서 관계 맺기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만우절에 실연하고 술집에 제일 처음 들어온 여자와 사랑을 하기로 결심 한 금성무, 여자 친구로부터 버림받은 양조위가 노래 ‘California Dreamin’을 좋아하는 왕페이와 만남과 이별, 다시 만남의 사랑 이야기, 누구 말처럼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냥 느껴”보라는 말이 생각난다. 영화는 우리들에게 이런저런 관계 맺기에 대한 새삼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많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생활하게 된다. 그런데 언제나 내가 경계하는 사람들이 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예의 그 싹싹함과 지나친 붙임성으로 급하게 다가오는 사람들이다. 조금만 인연이 될만한 구석이라도 발견했다가는 바로 형님, 선배님 또는 아우님, 후배님으로 호칭이 변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벌써 서로 알고 지낸 지 십 년이 넘은 것처럼 사이좋게 지내자고 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부담스럽기만 하다.


 언젠가부터 나는 처음 누구를 만나게 되면 먼저 묻기 전에는 가능하면 출신 학교, 태어난 고향이나 나이를 먼저 말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 친목질의 유형인 그들만의 학연, 지연, 혈연을 핑계로 시공을 초월해서 관계 맺기의 속도를 과속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연애를 하든, 친구를 사귀든 인간관계도 맛있는 요리처럼 오랜 기다림과 적절한 타이밍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곤지암 화담숲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면 참고 기다리며 스스로 부엌에서 그다음 단계의 일을 해야만 한다. 요리가 불에 익혀지는 그 냄비만 들여다보고 있지 말고 함께 곁들여 먹을 밥과 반찬들을 식탁 위에 가져다 놓기도 하고 먼저 젓가락 숟가락을 차려 놓아야 한다. 그런 일련의 기다림과 준비 과정이 있어야 맛있는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요즘 같은 봄날에는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입맛을 돋우는 얼갈이배추 겉절이를 직접 만들어 먹기도 한다. 겨울 내내 먹었던 김장 김치에 질리기도 했겠지만 한편으로는 제철 식재료를 이용한 입맛 돋우는 김치를 먹어야 할 계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치를 직접 담가 먹지 않을 때는 새봄이 오면 아파트 상가 반찬가게에서 입맛 돋는 얼갈이배추 겉절이 김치나 오이소박이 김치를 사다 먹고는 한다.



 사람과의 관계 맺기도 김장 김치처럼 많은 재료 준비와 김장 담그는 과정을 거치고 또 김치 냉장고에서 오랜 숙성과정을 거치면서 그 맛의 깊이가 정해지는 것처럼, 우리들의 인간 관계도 오랜 만남을 통해서 희로애락의 과정을 거치며 상호 존중과 신뢰 또한 깊어지기 마련이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예의 그 싹싹함과 붙임성으로 다가오는 관계는 어떻게 보면 계절의 식재료에 따른 얼갈이배추 겉절이처럼 일회성 필요나 입맛을 돋게 하기 위한 목적성을 지닌 것 같은 관계 맺기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나는 더욱더 경계하는 버릇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봄날은 추운 겨울을 견디고 지내온 벚나무들한테 서두르지는 않지만 쉬지 않고 따뜻한 바람으로 그들의 본성을 깨우고, 때때로 촉촉한 봄비로 벚나무들을 어루만질 때 오랜 침묵을 깨고 메말랐던 가지에서 새하얀 팝콘처럼 꽃잎을 펼치고 봄의 시작을 알린다.


 그처럼 우리들의 관계 맺기 또한 서둘지 말고 쉼 없이 서로에게 따뜻한 마음과 정을 나눌 때, 그 관계는 더욱 숙성되고 점점 더 발효되어 깊은 맛을 내게 된다. 모든 관계 맺기는 서두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오랫동안 쉬면 안 된다. 봄날이 벚나무에게 하듯 서두르지는 않지만 쉬지 않고 진심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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