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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Jul 14. 2023

라면을 먹을 때는 농부처럼 커피를 마실 때는 여왕처럼,

신언서판(身言書判)


 TV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다큐 인사이트’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정원을 가꾸며 사는 어떤 할머니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하는 모습과 태도는 겸손하지만 교양 있는 얼굴에서 보이는 포스가 무언가 범상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분이라는 게 느껴져서 계속 보게 되었다.


 결국 프로그램 중반쯤에서야 그분이 서울대 교수를 은퇴하고 지금은 여주에서 홀로 가꿔온 삼천 평의 넓은 뜰과 그동안 모아 온 책이 가득한 서원을 이웃사람들에게 내어주고, 공유하는 일흔두 살의 괴테 연구에 세계적 권위를 가진 노학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힐링스테이, 가평


 몸뻬바지와 후줄근한 티셔츠를 입고 뜰에 엎드리듯 앉아 잡초를 뽑고 웃자란 잔디를 깎고 있었지만, 그 선한 얼굴과 태도에서 맑고 향기로운 사람임이 금방 느껴졌다. 우스갯소리로 누구나 서른 이전에는 생긴 대로 놀고 서른 이후에는 논대로 생긴다는 말이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말에 점점 신뢰가 가는 것은 왜일까. 오래 함께 살면 부부도 같이 닮아간다는 말도 그렇다. 각자 태어날 때는 자신의 환경을 선택해서 태어날 순 없지만, 우리가 살면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떻게 생활했느냐가 우리 인생을 결정짓고 또한 그 사람의 운명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품격은 사회적 지위나 경력, 학력과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다. 그 사람의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에 대한 태도와 가치관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들은 늘 좋은 친구를 사귀기를 바라고 결혼을 할 때도 상대방의 환경을 매우 중요시했을 것이다.


 아직까지 함께 할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굳이 남들이 정해놓은 시기에 맞출 필요 없고 내 인생의 시기에 맞추면 된다. 인생의 중대사를 서두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요즘의 청춘들은 그런 의사결정에 오랜 시간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처음 본 순간 삼초만에 호불호를, 또 다른 삼초만에 계속 만날지 말지를 결정한다.



 디지털시대의 통찰력을 믿어 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그런 성급함이 일 년에 20만 쌍이 결혼하고 일 년에 10만 쌍이 이혼하는 세상이 되지 않았을까. 물론 옛말에도 신언서판(身言書判)이란 말이 있다. 지금, 디지털 시대의 신언서판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신언서판은 옛날엔 처음 만나는 사람을 판단하는 그 시대의 기준이 되었다.



신언서판(身言書判), 처음 만나는 사람은 우선 상대방의 의관을 보고 판단하고, 그리고 말하는 교양과 글쓰기를 보고 대충 그 사람을 미루어 짐작한다는 뜻이다. 어쩌면 그런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스스의 부족함을 채우고 낮은 자존감을 메꿀 수 있다는 심리에서 명품 소비지수 세계최고의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씁쓸한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의 전반적인 경제, 사회 수준에 맞지 않는 명품소비가 그 사람을 품격 있게 만들지는 못한다. 좋은 옷이란 그 옷을 입는 사람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하는 옷이고, 그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옷이다. 반대로 그 옷을 입은 사람은 안 보이고 명품 브랜드 로고나 그 옷만 먼저 보이면 그 옷은 그 사람과 잘 맞지 않는 옷이다.



 그 옷을 입는 사람이 옷을 지배해야지 옷이 그 사람을 지배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누군가 비싼 명품백을 구입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던 날, 자신이 비를 맞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명품백을 온몸으로 감싸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 명품백에게 지배당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본 후 더 이상 명품을 구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운동과 독서는 일부러 자랑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있다. 꾸준히 운동을 하는 사람은 무슨 옷을 입든 맵시가 있고,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은 저절로 그 품격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라면을 먹을 때는 농부처럼 커피를 마실 때는 여왕처럼, 그런 사람들은 대개 언제나 T.P.O, 때와 장소 그리고 경우에 어긋나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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