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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Aug 26. 2022

여태까지 숨기고 살아온 게 있다면 계속 숨기고 살아요

나눈다는 것


 겨울 감성이 녹아있는 첫사랑의 로맨스 영화, 퀴어 영화, ‘윤희에게’(2019, 임대형 감독)를 폭염 예보가 있던 날 우연히 또 보게 되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윤희' 앞으로 도착한 한 통의 편지. 편지를 몰래 읽어본 딸 '새봄'은 편지의 내용을 숨긴 채 발신인이 살고 있는 곳, 북해도 오타루로 여행을 제안한다.


 그리고 ‘윤희'는 비밀스러웠던 첫사랑의 기억으로 가슴이 뛴다. '새봄'과 함께 여행을 떠난 ‘윤희’는 끝없이 눈이 내리는 그곳에서 첫사랑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는다.” 느린 호흡으로 담담하게, 차곡차곡 쌓이는 눈과 같이 잔잔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좋은 영화다.


우정힐스


 우연히 그 영화를 다시 보게 되면서 예전에 느낄 수 없었던 대사들 중에 문득 와닿는 대사가 있었다. 영화의 주인공 윤희(김희애)의 첫사랑이었던 다른 여주인공 쥰(나카무라 유코)이 자신이 운영하는 동물병원의 여성 고객인 료코가 자신에게 사랑의 감정을 표현했을 때, 우회적이지만 단호하고 명쾌하게 선을 긋는 장면이 있었다.



“저, 쥰 씨랑 있으면 왜 이렇게 편안하죠?

저랑 쥰 씨는 비슷한 사람인 것 같아요.

나 무슨 말하고 있는 거지? 취했나 봐.”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요.”


“쥰 씨는 왜 연애 안 하세요?”

“료코 씨​“


“네”

“이런 말 실례가 될 수도 있고

혹시 내가 오해한 걸 수도 있겠지만 용기 내서 말할게요.

저, 여태까지 저희 엄마가 한국인인 걸 숨기고 살았어요

저한테 이로울 게 하나도 없으니까

말하자면, 저 자신을 숨기고 살았던 거예요

혹시 여태까지 숨기고 살아온 게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숨기고 살아요.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요?”


자귀나무


 비록 상대방의 사랑의 감정을 받아들일 수는 없더라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함께 자신의 생각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순수한 상대방이 사회의 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로부터 당하게 될 상처를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평등(

All love is equal)해야 하지만 그녀에게 이로울 건 하나도 없으니까. 어떻게 보면 누군가에 대해 진심으로 많이 걱정하는 마음은 또 다른 사랑의 모습이다.



 가끔은 엄마가 사랑해서 하는 말인 줄 알면서도 아이들이 아내의 잔소리에 짜증을 낼 때, 내가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부모는 너희들을 걱정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라고 말한다. 누구 말처럼 어찌 보면 부부는 생각이 같은 사람이 아니고, 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오면, 자신이 한국인 엄마의 딸로 태어났지만 그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고 일본에서 살아가는 여주인공 쥰이 동물병원과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낀 매우 불편한 진실을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여성고객 료코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말해준 것이다.


 료코가 자신에 대해 느끼는 좋은 감정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그렇지만 료코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든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있다. 참고 견딜 수 없을 때는 견디지 말아야 한다. 아님 말고, 무작정 참고 견디면 병이 된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학교나 책에서 배웠던 교훈과 현실에서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고 가끔은 좌절할 때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게 ‘아픔과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과 행복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불편한 진실은 ‘아픔과 슬픔은 나누면 약점이 되고, 기쁨과 행복은 나누면 시기와 질투가 된다’는 말이 더 현실적일 때가 많았다. 중요한 건 ‘누구에게’ 나누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에게’는 주위의 좋은 친구들, 또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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