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언서판(身言書判)
TV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다큐 인사이트’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정원을 가꾸며 사는 어떤 할머니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하는 모습과 태도는 겸손하지만 교양 있는 얼굴에서 보이는 포스가 무언가 범상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분이라는 게 느껴져서 계속 보게 되었다.
결국 프로그램 중반쯤에서야 그분이 서울대 교수를 은퇴하고 지금은 여주에서 홀로 가꿔온 삼천 평의 넓은 뜰과 그동안 모아 온 책이 가득한 서원을 이웃사람들에게 내어주고, 공유하는 일흔두 살의 괴테 연구에 세계적 권위를 가진 노학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몸뻬바지와 후줄근한 티셔츠를 입고 뜰에 엎드리듯 앉아 잡초를 뽑고 웃자란 잔디를 깎고 있었지만, 그 선한 얼굴과 태도에서 맑고 향기로운 사람임이 금방 느껴졌다. 우스갯소리로 누구나 서른 이전에는 생긴 대로 놀고 서른 이후에는 논대로 생긴다는 말이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말에 점점 신뢰가 가는 것은 왜일까. 오래 함께 살면 부부도 같이 닮아간다는 말도 그렇다. 각자 태어날 때는 자신의 환경을 선택해서 태어날 순 없지만, 우리가 살면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떻게 생활했느냐가 우리 인생을 결정짓고 또한 그 사람의 운명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품격은 사회적 지위나 경력, 학력과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다. 그 사람의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에 대한 태도와 가치관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들은 늘 좋은 친구를 사귀기를 바라고 결혼을 할 때도 상대방의 환경을 매우 중요시했을 것이다.
아직까지 함께 할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굳이 남들이 정해놓은 시기에 맞출 필요 없고 내 인생의 시기에 맞추면 된다. 인생의 중대사를 서두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요즘의 청춘들은 그런 의사결정에 오랜 시간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처음 본 순간 삼초만에 호불호를, 또 다른 삼초만에 계속 만날지 말지를 결정한다.
디지털시대의 통찰력을 믿어 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그런 성급함이 일 년에 20만 쌍이 결혼하고 일 년에 10만 쌍이 이혼하는 세상이 되지 않았을까. 물론 옛말에도 신언서판(身言書判)이란 말이 있다. 지금, 디지털 시대의 신언서판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신언서판은 옛날엔 처음 만나는 사람을 판단하는 그 시대의 기준이 되었다.
신언서판(身言書判), 처음 만나는 사람은 우선 상대방의 의관을 보고 판단하고, 그리고 말하는 교양과 글쓰기를 보고 대충 그 사람을 미루어 짐작한다는 뜻이다. 어쩌면 그런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스스의 부족함을 채우고 낮은 자존감을 메꿀 수 있다는 심리에서 명품 소비지수 세계최고의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씁쓸한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의 전반적인 경제, 사회 수준에 맞지 않는 명품소비가 그 사람을 품격 있게 만들지는 못한다. 좋은 옷이란 그 옷을 입는 사람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하는 옷이고, 그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옷이다. 반대로 그 옷을 입은 사람은 안 보이고 명품 브랜드 로고나 그 옷만 먼저 보이면 그 옷은 그 사람과 잘 맞지 않는 옷이다.
그 옷을 입는 사람이 옷을 지배해야지 옷이 그 사람을 지배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누군가 비싼 명품백을 구입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던 날, 자신이 비를 맞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명품백을 온몸으로 감싸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 명품백에게 지배당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본 후 더 이상 명품을 구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운동과 독서는 일부러 자랑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있다. 꾸준히 운동을 하는 사람은 무슨 옷을 입든 맵시가 있고,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은 저절로 그 품격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라면을 먹을 때는 농부처럼 커피를 마실 때는 여왕처럼, 그런 사람들은 대개 언제나 T.P.O, 때와 장소 그리고 경우에 어긋나는 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