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아내
지난여름의 끝, 서울 근교의 조용한 숲 속에 카페와 숙소 그리고 유럽식 정원과 산책로가 잘 갖추어진 곳으로 일박이일 여행을 다녀왔다. 몇 번 다녀왔던 곳이라 잘 알고 있었지만 새삼 입구에서 차를 멈추게 하고 입장료를 받았다. 미리 예약한 호텔 투숙객이라고 했더니 만원에 가까운 입장료는 무료라고 말하며 그냥 통과시켜 주었다.
가까운 남이섬 둘레길을 한 바퀴 산책하고 오후 세시의 체크인 시간에 맞추어 입실할 계획이었지만 남이섬 선착장에 도착하니 휴일인 탓에 너무 사람이 많아 아내와 남이섬 산책을 포기하고 힐링파크에서 시간을 보내자고 말했다. 체크인 시간을 맞추기 위해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옆에 나란히 앉아서 카페 안을 둘러보던 아내가 말했다.
“여보, 지난번 보다 나이 든 사람들은 안 보이고 젊은 사람들만 더 많아진 것 같아요”
“그러게요. 아마 입장료를 받아서 그런가 봐요. 아줌마들끼리 차 한 대로 서너 명씩 와서 다른 부대시설은 이용하지 않고 카페에서 커피만 한잔 달랑 마시고 서너 시간씩 놀다 가니까 입장료를 받는 거 아닌가 싶네요 “
아내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말했다.
“여보, 왜 그런 식으로 말해요? 아줌마들이 그렇게 근검절약해서 아이들 공부시키고, 집 장만하고, 노후대책 세워놓은 거예요. 아이들 키워놓고 이제 조금 가사노동에서 해방되어 친구들과 함께 여가시간을 즐기는 거고요. 근검절약이 몸에 배서 그런 걸 이해는 못할망정 그런 식으로 흉보면 돼요, 안 돼요? “
“안 돼요. 내가 생각이 짧았네요. “
“ 물론,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까지 이해해 달라는 것은 아니지만, 아줌마란 말로 모두를 그렇게 일반화하는 것은 잘못이란 뜻이에요. “
카페의 어두운 조명 때문에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아내는 내가 많이 부끄러워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일반화의 오류, 아무 생각 없이 모든 아줌마들을 일반화해서 내뱉은 말 한마디에 스스로 많이 부끄러웠다. 누구나 마음속의 생각은 자신의 소유지만 밖으로 내뱉는 말은 듣는 이의 몫이 되기 때문이다.
숙소 체크인을 마치고 내려와서 유럽식 정원을 함께 산책하는 내내 많이 반성했지만 민구스러운 탓에 아내에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동안 입장료를 받지 않았던 것은 코로나 기간에 고객들에 대한 배려였지 그런 의도도 아니었다.
그처럼 나는 가끔 아내로부터 오랜 사회생활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혼이 많이 닳았다는 비판을 받을 때가 있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겠는가. 언젠가 보았던 TV의 ‘다큐온’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전영애(서울대 명예교수) 선생님이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던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아내는 자신도 가장 싫어하는 말이라며 그 과정과 절차가 올바르지 않으면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앞에서 언급했던 그 중년여성들처럼 아내 역시 월급쟁이 아내로서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일 뿐만 아니라 언제나 법과 원칙에 충실한 바른생활 어른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가정형편이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화장실을 이용하고 불을 끄지 않는다던가, 또는 에어컨을 혼자 몰래 틀고 있다가 혼이 나는 경우가 많다. 아내는 이젠 돈 문제가 아니라 습관이 되니 그냥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가 불편해서 그렇다고 말한다. 또한 옛날엔 중국음식점만 가면 아내가 탕수육과 짬뽕만 시키는 게 너무 싫었다. 물론 내 얇은 지갑을 배려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부터 함께 중식당에 가면 내가 무조건 전가복을 먼저 시키다 보니 지금은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중국요리가 되었다. 다행인 것은 그렇다고 아내가 결핍이 있거나 스케일이 작은 건 아니다. 바쁜 내대신 혼자 집도 사고팔고, 중요한 투자의 은행거래도 혼자 척척 수행하며 튼튼한 가정경제를 지탱해 왔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보다 그릇이 크고 현명한 건 분명하다.
직장생활 후반기, 아내의 검소한 생활습관을 잘 알고 있기에 선의의 목적으로 아내 몰래 비자금을 조금 조성했다. 은퇴 후 나름 호연지기를 잃지 않고 아내를 품격 있게 잘 모시기 위한 목적일 뿐이었다. 덕분에 그동안 함께 했던 여행, 각종 음악제, 외식 및 문화행사 등에서 신사의 품격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모종의 고지서 탓에 아내는 그 비자금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선의의 목적으로 조성한 비자금의 실체를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아내의 질책은 없었지만 지출이 필요할 때마다 다정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워졌다.
아내를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맛집을 찾아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전망 좋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행복의 기준을 삼지 않는 삶의 태도이다. 함께 패키지여행을 갈 때면 아내는 여행이 끝날 때쯤, 늘 현지 가이드에게 가족과 함께 맛있는 식사를 하라며 봉투에 든 격려금을 조용히 건네고, 명절 때마다 아파트 경비원분들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는다.
또한, 열심히 준비한 지역축제나 재래시장을 방문할 때면 지역활성화에 도움도 주고 매너도 챙길 겸, 그 지역 특산물과 먹거리 서너 개 정도는 팔아주는 여유와 배려가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오늘날의 풍요로운 대한민국은 그녀들의 헌신 덕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이 들면 알게 되겠지만, 아내와 행복하게 잘 지내는 것이 가장 성공한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