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역대급 태풍 카눈이 당초 예상진로를 벗어나 한반도를 관통한다는 뉴스가 계속되던 때였다. 지난 봄맞이 여행에서 제천 의림지를 둘러보면서 올여름 ‘제천 국제 음악영화제’(JIMFF)에 다시 한번 오자고 아내와 약속했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역대급 태풍뉴스를 종합해 본 결과, 아쉽지만 미리 예약해 둔 개막식 참석 및 축하음악제의 이박삼일 호텔일정과 예매티켓을 페널티를 물고 모두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태풍은 다행스럽게도 내륙을 관통하면서 큰 피해를 남기진 않았다고 하나 여기저기 꽤 많은 상처를 남기고 지나갔다. 그리고 불참에 아쉬워하는 아내를 위해 대신 집 앞 쇼핑몰 영화관에서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 관람 캠페인에 나섰다. 콘크리트유토피아, 밀수, 비공식작전을 순서대로 매일 관람했다. 물론 첫날은 워밍업으로 내가 보고 싶어 했던 ‘미션 임파서블:데드 레코닝’으로 시작했으며 나흘 연속 영화관람을 했다. 최근 개봉한 한국 영화는 모두 나름대로 재미있었고 만족스러웠다.
제천 국제 음악영화제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탄탄한 기획과 연출의 한국영화 관람과 영화관람 전후의 쇼핑몰에 잘 갖추어진 맛집에서 대접한 다양한 식사에 아내는 대체적으로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제천 음악영화제를 취소하고 환불받은 금액만큼 충분히 비용이 투입되었고, 무더운 여름 오후에 대여섯 시간을 시원한 공간에서 더위를 피할 수 있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금요일 저녁, 나흘간의 한국영화 캠페인을 끝내고 돌아와서는 이번 세계잼버리대회 폐회를 겸한 ‘K-팝 슈퍼 라이브’란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아내가 국뽕에 빠진 애국자라며 놀리고 자신은 모바일 게임에 집중했다.
이유야 어떻든 세계적 망신을 자초한 새만금세계잼버리대회에서 상처받은 어린 대원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무리하게 추진된 K-팝 콘서트지만 이왕지사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잼버리 이후 그 잘잘못은 훗날을 위해 기록하고 가려졌으면 했다.
며칠 동안 쇼핑몰의 식당가에서 맛집을 둘러보던 중 가끔씩 잼버리복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외국대원들을 발견했다. 그들을 볼 때마다 아내가 트위터에서 읽은 신문기사 내용을 소개했다. 참가 사흘 만에 새만금에서 제일 먼저 철수하고 서울로 이동했던 영국대원의 부모가 잼버리에 참석한 아이와 통화하며 나눈 대화라고 말했다.
그 잼버리 대원인 아이가 가는 곳마다 만나는 한국사람들이 아이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어떤 제과점에서는 잼버리 대원이 이웃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케이크를 보내왔다며 한국사람들의 친절이 무서울 정도라며 칭찬했다고 한다. 그리고 철수한 주요 이유는 물웅덩이 새만금도 문제지만 화장실, 샤워실, 급식등의 열악한 보건 위생에 관한 문제였다고 한다.
몇 년의 준비기간을 거친 잼버리대회 하나 치르는데도 일주일 넘게 온 나라가 준전시동원체제를 방불케 했으니, 정말 갑자기 전쟁이라도 나면 어떻게 될까 문득 겁이 났다. 내 기억으로는 1991년 8월, 고성세계잼버리대회가 성공적으로 치러졌지만 지금 그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두 번의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우리에게는 사실 뭐 대단한 국제행사 스케일도 아니고 잼버리, 말 그대로 “유쾌한 잔치, 즐거운 놀이”, 즉 대원들끼리 서로 사귀며 교류하는 축제일뿐이다.
일본도 간척지에서 잘 치렀건만 새만금이 새삼 무슨 문제이겠는가. 오랜 준비기간 동안 잼버리를 잘 개최할 수 있도록 부족한 시설을 보완하고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했으면 될 일이었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 태풍예보에 잼버리 대원들이 새만금 야영장을 철수한 이후처럼 유관부서의 총력 대응이 진작에 있어야 했다. 무엇이든 잘하려고 하면 방법이 보이고 하기 싫으면 핑계가 먼저 보이는 법이다.
또한, 32년 전 우리가 후진국일 때도 성공적으로 치렀고, 그 정도 국제행사는 잘만 치렀으면 일반인들의 기억에 크게 남을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되었건만 뉴스만 보더라도 후진국에서 조차 일어날 수 없는 총체적 부실로 그동안 문화 예술분야를 포함, 우리의 많은 분야에서 잘 브랜딩해온 ‘선진문화강국 코리아’의 이미지를 하루아침에 추락시키고 마는지 너무 안타까울 뿐이다.
기업에서도 일 못하는 조직은 회사의 중요한 행사를 진행할 때 드러난다. 무능한 리더십과 함께 불명확한 업무지시는 물론이고 세부적인 행사의 디테일엔 관심 없고 윗사람들의 관심사만 챙기고, 정작 행사의 중요한 일이나 궂은일은 조직 간에 서로 미루고 말단이 알아서 해야 하니 아무런 의사결정 권한도 없는 실무자만 속이 타게 마련이다. 다행히 그 행사가 성공적으로 끝나기라도 하면 젓가락만 걸치고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던 행사 관계자들이 논공행상에 빠질까 서로 앞다투어 생색을 내기 시작한다.
또한, 만일 그 행사가 이번처럼 예상치 못했던 무더위나 태풍, 또는 사전 준비부족과 미흡한 운영 때문에 실패라도 하는 날이면 플랜 B가 없었다는 둥,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둥 그동안 수수방관 지켜만 보던 관계자들이 여기저기서 매우 세밀하게 잘 분석된 평가와 판단, 실패원인이 나타나고 조직 간에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에 바쁘다.
결국 마지막엔 그 행사 진행에 몇 날며칠 날밤을 세우며 동분서주하고, 중요한 의사결정에는 참여하지도 못했던 실무자 한 사람만 최종 책임자로 남는다. 그게 기업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 못하는 조직의 특성이다. 그리고,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회사 행사의 최종 책임자는 그 회사의 CEO일 뿐이다. 또한, 그 실패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그 회사는 망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