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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Dec 01. 2023

어떠한 영광도 세월을 건너뛸 수는 없는 법이다

영화, 서울의 봄


지난 휴일, 아침 일찍 혼자 집을 나서 영화 ‘서울의 봄’(2023)을 보았다. 그 영화 광고를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배우 정우성이 열연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연기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아내와 함께 그 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아내는 불편해서 그 영화를 끝까지 볼 자신이 없다는 의사표시를 여러 번 표현했다. 그 이유를 충분히 알기에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요일 이른 아침을 선택해 혼자 영화를 보고 왔다.



 영화 ‘서울의 봄’은 역사적 사실관계 자체가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사실 뭐 새롭고 궁금할 것도 없는 플롯이었다. 하지만 그 영화를 소개하는 글을 여기저기서 많이 보았고, 그 영화에 출연한 정우성, 황정민, 김의성, 김성균 배우의 연기에 대한 호평이 많았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아내와 취향이 다른 영화는 혼자 영화를 보는 것에 익숙해 있다. 아내는 특히 칼부림의 조폭영화나 귀신이 나오는 무서운 영화를 싫어한다. 물론 이 영화는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그 영화의 내용은 어떻게 보면 조폭집단 같은 군내 사조직 하나회의 쿠데타를 물리치는데 실패한 내용일 뿐이다. 이미 그 사실관계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날밤 9시간의 긴박했던 역사적 진실의 디테일을 화면으로 보면서 고구마를 먹고 체한 것처럼 너무 가슴이 답답했다. 요즘 남북 양측이 서로 9.19 군사합의를 파기하고 긴장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기를 희망하지만 과연 이런 군지휘부라면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있을까 의문을 가졌다.


어승생악, 한라산


 삽 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부부가 옆자리에 앉았고 그 아내가 내 바로 옆에 앉아서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가 중반을 지나고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한 정우성(이태신)의 고군분투가 빛을 더해갈수록 시종일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연신 훌쩍이고 눈물을 닦아내는 바람에 집중이 어려웠다. 나는 그 영화를 만든 김성수 감독처럼 1980년 대학교에 입학을 해서 그 역사적 사실관계가 진행될 때 직간접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었으니 별문제는 아니었다.



 옆자리에 앉아 함께 영화를 보았던 젊은 부부의 아내분이 왜 그렇게 눈물을 흘렸는지 궁금했다. 그 영화 속의 전두광에게 희생된 진압군 측의 후손이 아닌가 생각했다. 마지막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군가 ‘전선을 간다’가 비장하게 울려 퍼지면서 조명이 켜졌지만 그 이유를 끝내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 젊은 부부의 나이로 보아 그 영화의 배경이 된 1979년 12월 12일 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 혼돈의 시대를 직접 겪었던 나는 눈물은 고사하고 이제 분노는커녕 다시 보아도 그냥 가슴만 답답할 뿐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자막처럼 민주화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있던 ”서울의 봄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암울한 겨울이 시작되었고 그저 견디고만 있을 뿐이었다.



 영화 ‘서울의 봄’을 보면서 답답한 마음 한편에서 그때 정우성(이태신)이 연기한 진압군이 그 반란군을 제대로 진압했더라면, 80년대 내가 다니던 대학의 캠퍼스 문과대학 옥상에서 전단을 뿌린 후 확성기를 들고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면서 투신했던 몇몇 학우들의 죽음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박종철, 이한열 열사도 지금쯤 우리 사회에서 그들의 찬란한 꿈을 펼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광주민주화운동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끝내 영화에 몰입할 수 없었다. 아니, 이미 충분히 그 시대를 살아낸 만큼 나는 몰입할 필요도 없었다. 시간이 오래되면 감정은 엷어지고 결과만 남는다.



 그동안 몇 번의 우여곡절과 역사의 전진과 후퇴가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결국 그 군사반란의 수괴 전두광(황정민)은 대통령이 되었고, 최전방에서 군대를 물리고 서울로 진격해 그를 도운 친구 노태건(박해준) 또한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어떠한 영광도 세월을 건너뛸 수는 없는 법이다.


 반란군에 가담했던 핵심 인물들은 모두 부귀영화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진압군의 핵심 인물 이태신(수경사령관)과 공수혁(특전사령관)의 삶과 대비되는 천수를 누리고 자연사했다. 그저 슬픈 것은 인간이 삶은 개떡같이 살다가 잘 죽을 수는 없다는 나의 오랜 믿음을 깨버렸다는 사실이다.



 영화 ‘쑈생크 탈출’(1995)에서 그 쑈생크 교도소에 처음 들어온 죄수가 울부짖으며 자신은 죄가 없다고 소리치며 아마도 그 교도소 담벼락을 원망했던 장면이 있었다. 그 교도소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며 이미 교도소에 익숙해진 레드(모건 프리먼)가 했던 말이 다시 생각났다. “처음에는 저 벽을 원망하지. 하지만 시간이 가면 저 벽에 기대게 되고 나중에는 의지하게 되지. 그러다가 결국엔 삶의 일부가 돼버리는 거야.”



 1979년 12.12사태의 그날밤 이후, 기성세대들 중에도 결국 그렇게 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심지어 지금도 그 시절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의 말처럼 젊은 관객들이 많이 보았으면 좋겠다. 젊은 관객들에게 다시 한번 이 영화를 통하여 하나회 반란군을 박제된 단체사진과 함께 역사의 패배자로 만들고, 참 군인의 직분에 충실했던 진압군을 역사의 승리자로 기억할 수 있게 해 준 감독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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