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일기예보에서 지난 주말에 첫눈도 내리고 기온이 급강하하면서 영하 4도까지 내려간다고 했다. 마침 주말엔 아무런 약속도 없었기 때문에 따뜻한 집안에서 지내기로 했다. 에너지 절약에 동참할 겸 패딩조끼를 입고 거실 소파에서 무릎담요를 덮고 누워서 케이블 영화채널에서 보여주는 영화를 다섯 편이나 보았다. 어떤 글에서 누군가 회사 일을 그만두면 하루종일 영화 다섯 편을 보는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말 그렇게 해보면 그 느낌이 어떨까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그냥 궁금하면 한다. 어떤 책이 궁금하면 읽고, 어디 음식 맛이 궁금하면 가서 먹어본다. 무슨 영화가 궁금하면 찾아보고, 어떤 곳이 궁금하면 찾아간다. 일기예보처럼 금요일 오후에 첫눈이 조금 흩날리긴 했다. 하지만 서울의 첫눈이란 늘 그렇듯 첫눈 같은 첫눈 아닌, 첫눈의 느낌일 뿐이었다. 영화 ’ 건축학개론‘에서 첫눈이 내리던 날 만나자던 승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연이 찾아갔던 그 한옥집에 내리던 그런 함박눈은 아니었다.
케이블 TV의 영화채널을 재핑(zapping)하며 금요일 오후부터 토요일 오후 늦게까지 내리 다섯 편을 보았다. 진주만(2001), 800(2020), 해빙(2017), 건축학개론(2012), 하류인생(2004)을 서너 시간씩 건너뛰며 계속 보았다. 영화 진주만과 건축학개론은 이미 보았던 영화였지만 처음 보았을 때의 기억 이 좋았던지라 다시 보기로 했다. 나이가 들면서 이제 뭐든 다시 기억하면 십 년, 이십 년 전쯤의 일이 된다.
그중 ‘건축학개론’(2012)은 십 년 전에 동네 영화관에서 아내와 함께 처음 보았다. 휴일 영화를 보고 다음날 출근해서 회사 미팅 때 영화 건축학개론 얘기를 꺼냈더니, 함께 일했던 후배가 자기도 아내와 함께 보았는데 영화가 끝날 때쯤 그 후배가 그만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분위기가 매우 썰렁해졌다는 얘기 때문에 오래 기억에 남았던 영화였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의 슬픈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가 프랑스 4대 문학상의 하나인 ‘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수상했다는 뉴스를 보고, 인터넷서점에서 주문했던 그녀의 소설 읽기를 주말엔 잠시 중단하고 있었기도 했다. 그 소설은 제주 4.3의 비극을 세 여성의 시선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계속 읽을수록 내 마음을 먼저 돌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읽었던 할레드 호세이니의 소설, ‘천 개의 찬란한 태양’과 뉴스의 이스라엘 전쟁범죄로 인한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난민들 때문에 이미 마음이 많이 아팠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제도권 교육에서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던 그 제주 4.3 사건의 참혹한 민족사적 비극을 단편 소설 ‘순이 삼촌’(현기영)과 영화 ‘지슬’(2013)을 보고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 마음도 챙길 겸, 첫눈이 내린다고 우중충하니 추운 날씨라 따뜻한 거실에서 주말 내내 영화를 보았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OST인 ‘기억의 습작’(김동률)을 들으며 문득 그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불어 번역판 제목이 ‘불가능한 작별’(Impossibles adieux) 임을 깨닫고, 과연 우리에게 작별할 수 없는 기억이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주인공처럼 승민(이제훈)과 서연(배수지)의 첫사랑이라면 그 기억에서 작별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들이 대학에 입학해서 서로가 순수한 설렘의 느낌을 가질 때가 언제쯤일까 궁금했다. 영화 속에서 승민이 겨울 방학을 할 때쯤 강의실 밖 벤치에서 연락이 되지 않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서연에게 “이제 그만 좀.. 꺼져 줄래?”라는 차가운 말을 남기고 돌아설 때 보이던 교내 플래카드를 보면 1996년도 인 것이 분명했다.
그 영화 속에서 남녀 주인공들은 대학입학 후 십 년이 지난 시간을 넘나들었지만, 이제 사십 대 중반을 훌쩍 넘어서고 있을 것이다. 지금쯤, 서로가 서투르기만 했던 첫사랑 같은 첫사랑 아닌, 첫사랑이 있었다면 과연 그들은 한강의 소설 불어판 제목처럼 ‘불가능한 작별’일까 궁금하기만 하다.
부디, 누구든 그 영화 속의 여자 주인공 서연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제주도의 슬픈 역사, 제주 4.3 사건처럼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민족사적인 아픈 기억이 아닌, 첫눈처럼 싱숭생숭 설레는 추억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슬픈 것은 인간은 몸이 아니라, 감정이 먼저 늙는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