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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Dec 07. 2023

누구든 깊이가 없으면 바닥이 보이기 마련이다

선의의 순환


 TV 뉴스에서 연탄 봉사를 하는 저녁 프로그램을 보면서 우연히 트위터를 둘러보다 아래와 같은 따뜻한 글을 읽었다. 그 이야기는 요즘같이 삭막한 세상에서 내가 경험했던 차량 사고처리가 떠오르면서 조금은 비현실적인 내용이었다. 한편으로는 그 이야기 속의 피해차량 소유주는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그렇게 자존감이 높고 대인배처럼 행동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온 그의 삶이 고스란히 그 이야기 속의 내용에 응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출근길 주차장에서 이웃주민 차를 긁었다. 내려서 보니 나는 실물로는 처음 보는 엄청 비싼 외제차. 허허 망했네. 전화를 하려고 보니 차에 전화번호가 없다. 좀 망설이다 메모를 남기고 우선 출근을 했다. 오만 생각이 들었다, 뺑소니 되면 어쩌지. 그냥 경비실로 바로 연락했어야 했나.


 안 되겠다 싶어 바로 보험사에 사고접수를 하고 경비실로 전화를 해서 차량 번호를 불러주며 차주를 연결해 달라 했다. 불안한 마음에 주차장에  CCTV 있는지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5분도 안되어 경비실 연락을 받았다며 차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러저러 사정을 설명하고 출근에 늦을까 봐 그냥 자리를 떴다고 말을 했는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말이..


"아이고 출근길에 놀랐겠어요. 차는 고치면 되고 사람 안 다쳤으면 되니 출근길에 신경 쓰고 전화하지 말고 안전 운전하세요."


크고 작은 사고를 내거나 당할 때마다 '너 잘 걸렸다'를 시전 하던 사람들만 만나와서 인지 그분의 말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주 오래전, 내 차 범퍼를 살짝 받고 정말 사시나무 떨듯 떨며 운전석에서 내린 한 차주에게 “범퍼 그거 운동화 밑창 같은 거예요. 받으라고 있는 거죠" 하고 “서로 안 다쳤으니 됐죠. 그냥 갑시다”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악의에 지치는 나날들 속에서도 여전히 선의는 순환한다고 그렇게 믿어보자. “

 

남산타워 가는 길


 아침 출근길에 생각지도 못한 접촉사고를 내고 많이 당황했을 이야기의 화자에게 전화를 걸어 대뜸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순간적으로 그렇게 나올 수 없는 말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비록 짧고 간결한 메시지이지만 그 말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얼마나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높으면 잘 알지도 못하는 아니, 사고를 낸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배려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더욱 존경스럽고 닮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몇십 년 전 가족 나들이중 정체구간에서 아이와 장난을 치다 옆차가 출발하길래 순간 따라 출발하면서 멈춰있는 앞차와 살짝 접촉사고가 있었다. 놀란 나머지 차에서 내려 앞차를 살펴보니 뒤 범퍼에 특별한 흔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차의 운전석으로 다가가서 괜찮냐고 안부를 물었더니 창문만 내리고 괜찮다고 말했다. 뒷좌석에 앉아있던 노년의 어른이 있어 안부를 하고 그래도 혹시 그 어른이 문제가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명함을 주고 헤어졌다.



 그 휴일의 사건을 잊고 열심히 일하던 중, 며칠이 지나서는 그 접촉사고 피해자인 사십 대 남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갑자기 허리가 아프다면서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연로하신 뒷자리의 그의 어머니도 아니고 전혀 문제가 없었던 그가 무리한 합의금을 요구한 탓에 뻔한 거짓말로 치부하며 정의감이 발로 해서 합의 요구를 거절하고 보험처리를 하겠다고 말했다. 물론 조금만 있으면 십 년 무사고에 따른 향후 반액정도의 자동차 보험금할인은 날아갔다. 인간은 누구든 깊이가 없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바닥이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 깊이 없는 인간의 무리한 금전요구에 합의하지 않고, 오히려 많은 손해를 본 그 의사결정을 존중하고 나의 자존감을 지킨 걸 합리화하고 있다. 접촉사고 당시 웃으며 괜찮다고 돌아 선후 며칠 뒤 뻔뻔하게 무리한 돈을 요구한 그의 의도를 알기에 단돈 십원 한 푼도 줄 수 없는 것이 나의 자존감이었다. 아마도 내가 그 젊은 나이에 계산적인 금전적 손해에 타협할 정도의 낮은 자존감 밖에 가지지 못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별것도 아닌 접촉사고를 핑계로 주변의 부추김을 듣고 스스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금전적 합의를 요구하고, 거절당하니 거의 이 년가량 여기저기 아프다고 병원을 다니며 온몸을 고쳤다. 지금은 그 사람이 그냥 건강하게 잘 살았으면 그나마 보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태어나서 누구 한 사람에게라도 도움이 되고 삶이 수월해졌다는 얘기를 듣는 것이 성공이라고 랄프 왈도 에머슨이 그의 시, ‘무엇이 성공인가’에서 말했으니 말이다. 트위터의 그 따뜻한 이야기 속의 화자가 몸소 실천하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 사회의 ‘선의의 순환’을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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