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퍼펙트 데이즈
광복절 일주일 전, 영화 ‘행복의 속도’(2021)를 보고 오래전 예약해 둔 도쿄에서 100km 떨어진 오제습지 트레킹을 취소해야 될지 결론을 못 내리고 난카이 대지진 뉴스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었다. 다행히 광복절 오후 5시에 일본 기상청은 대지진 주의보를 해제했지만 생필품을 준비하고 대지진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말했다. 다음에 갈 수도 있었지만, 다음은 다음이고 지금은 지금이니까.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대지진이기도 했지만 그동안의 삶을 뒤돌아 볼 때 로또만큼 맞출 확률이 낮은 난카이대지진으로 낭패를 볼 것 같진 않았다. 무엇보다 지진해일의 위험이 덜한 오제국립공원의 해발 1500m 산속이니 다행이다 싶어서 예정대로 출발했다. 두 시간 남짓 걸리는 도쿄까지 기내 영화 한 편 보고 나면 도착하겠지 싶어 기내 영화목록을 살펴보았다.
빔 벤더스 감독이 만든 일본영화, ‘퍼펙트 데이즈’(2024)를 보고 싶어 했는데, 그 영화가 마침 기내영화 목록에 있었다. 비행기가 택싱(Taxiing)할 때부터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오제트레킹을 다녀온 후 영화관에서 다시 그 영화를 보았음은 물론이다.
90년대 초, 요즘 광고 카피에 의하면 한 끼 정도는 함께 하는 사이가 식구라는데 난 식구가 아닐 때가 많았다. 회사일로 바쁜 내대신 영화로 외로움을 달랜 아내 덕분에 영화에 빠져 많은 영화와 관련 서적을 읽었다.
또한 아내가 비디오가게 주인에게 부탁해 빌려온 구하기 어려운 명작 영화를 봤었다. 그때 좋아했던 영화감독들 중의 한 명이 영화 ‘파리, 텍사스’, ‘베를린 천사의 시’를 연출한 빔 벤더스 감독이었다. 그리고, 일본 영화 ‘쉘위댄스’(Shall We Dance, 2000)로 처음 만났던 영화배우 야쿠쇼 코지는 작년 칸영화제에서 이 영화로 남우주연상을 받았던 작품이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도쿄 시부야의 공공시설 청소부 ‘히라야마’는 매일 반복되지만 충만한 일상을 살아간다. 오늘도 그는 카세트테이프로 올드 팝을 듣고, 필름 카메라로 나무 사이에 비치는 햇살(코모레비)을 찍고, 자전거를 타고 단골 식당에 가서 술 한잔을 마시고, 헌책방에서 산 소설을 읽으며 매일의 완벽한 하루를 마무리한다 “는 플롯이다.
하지만, 그 완벽하게 매일 반복되는 하루의 루틴이 함께 일하는 젊은 동료의 여자친구가 등장하는 순간과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조카딸이 가출해 찾아오면서 매일의 완벽한 루틴이 깨졌다. 그리고 주인공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의 평정심이 무너지고 만다.
아마도 두 시간의 영화 중 전반부는 비디오를 반복 재생시켜 놓은 줄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하루의 루틴이 매일 반복되었다. “바쁜 삶에서 한 걸음 벗어나 이를 바라보는 계기가 되어주었으면 합니다“라는 주인공 야쿠쇼 코지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그의 루틴한 일상 중 간간이 매번 다른 올드팝송이 카세트에서 리플레이되었다. 영화 ‘접속(1997)의 OST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갈망을 노래한 ‘Pale blue eyes’(The velvet underground)와 미국 구전가요로 헛되이 보낸 인생을 한탄하는 ‘House of the rising sun’(The animals), 이별의 아픔을 표현한 루 리드(Lou Reed)의 ‘Perpect Day’는 매우 귀에 익숙한 노래라서 시간을 거꾸로 되돌리는 모티브가 되기에 충분했다.
퍼펙트 데이즈(Perfect Days), 회사생활을 마치고 매일의 루틴이 있는 미니멀한 일상을 생활하고 있는 내 모습이라서 크게 낯설지 않았다. 단지, 그 영화의 주인공과 다른 점은 더 이상 돈을 벌기 위한 출근만 없을 뿐, 스스로 몸에 체화된 하루의 루틴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남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남에게 기대지 않을 때 삶은 더욱 건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차피 인생은 무한 반복의 삶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