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들은 오고 가고, 또 온다

잘 살고 있다는 증거

by 봄날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들으며 슈톨렌과 함께 커피를 마시기 좋은 계절, 겨울이다. 해가 일찍 지고 거의 매일 눈이 올 것 같은 흐린 날씨와 어둑어둑한 날씨가 계속되는 날이 많아지고 있다. 무엇보다 겨울은 드라마나 영화를 보기에 딱 알맞은 날씨라는 점이다. 해가 짧아 서두르지 않으면 어딜 다녀오기도 마음이 불편할뿐더러 추운 날씨 관계로 트레킹이나 여행을 가기에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를 넷플릭스나 유튜브에서 찾아본다.



물론 가끔은 궁금한 책을 인터넷 서점 카트에 담아두긴 하지만, 읽지 않고 책상 위에 쌓여가는 책을 바라보면 금방 구매할 용기가 나질 않는다. 대신 음악을 듣거나 비주얼의 시대에 맞게 영상으로 볼 수 있는 드라마와 영화에 쉽게 손이 갈 뿐이다.


최근에 ‘미지의 서울’(tvN), ‘서울 자가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jtbc), ‘자백의 대가’(넷플릭스)라는 시리즈를 봤다. 또, ’경도를 기다리며’(jtbc)라는 드라마를 보고 있다. 아내는 뻔한 스토리라고 해,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는 ‘러브 미’(jtbc)도 함께 본다.


책읽는 고양이(북카페), 이화동 하늘마을정원길


또한, 잘 만든 영화 ‘세계의 주인’, ‘여행과 나날’을 봤으며 최근 개봉된 영화, 꼭 영화관에서만 봐야 할 영화 ‘아바타:불과 재‘를 봤다.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등, OTT와의 치열한 경쟁에서 밀려 이제 한국 영화는 거의 개봉작이 나오질 않고 있다.


간간이 잘 만들어진 독립영화 정도가 개봉되지만 그나마 하루 상영 횟수가 한번 또는 두 번 뿐이라 그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한국 영화가 없다고 하니 내년 상반기에도 마찬가지 상황이 될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한양도성 성곽길(동대문 -> 이화동->혜화동)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 제맛이라는 꼰대적 믿음 덕분에 아무리 넓은 TV로 집에서 본다 한들 그 영화적 매력을 느끼기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회사생활을 할 때 가장 큰 꿈이 하루 종일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집에 처박혀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 외에 클래식 음악, 책 읽기, 여행, 트레킹은 그저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행위일 뿐 꿈에 그리던 일은 아니었다. 그 실행의 기준은 그냥 궁금하면 듣고, 읽고, 궁금하면 가고, 걷는 것이다. 게으름은 상상력만 키울 뿐이니까.



우연히 봤던 ‘나는 SOLO, 그 후 사랑은 계속된다’의 촬영지, 경북 영양의 산해리 오층 모전석탑을 너무 가보고 싶었지만, 그 폐사지의 석탑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신록의 계절, 내년 오월에 갈 수 있도록 모바일달력에 기록해 두었다.


가끔은 이렇게 유유자적( 悠悠自適), 비생산적인 하루를 사는 것이 맞는 것인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이런 현대적 룸펜(Lumpen)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학교 졸업 후 바로 입사해 평균 주당 60시간 이상씩 35년을 일했다.



대개 인간은 30년쯤 공부하고, 30년쯤 일하고, 30년쯤 놀 수 있다. 그 마지막 30년쯤 놀 수 있는 것만 개런티 되지 않는다. 각자의 운명에 따를 수밖에 없으니 그렇다. 그런 신념에 따라 장기적으로 놀면서 아내의 수행비서 겸 운전기사, 가사노동 및 주방보조라는 책무를 가지고 살고 있다. 사실 인생의 본질은 밥 해 먹고, 설거지하고, 청소하는 것의 반복일 뿐이니까. 그런 본질적 임무수행에 큰 불만은 없다.


마실, 369 성곽마을 카페


우연히 트윗을 둘러보다가 일곱 가지 “잘살고 있다는 증거”라는 글을 발견했고, 그 증거들에 맞게 잘 살고 있는지 돌아보았다.


1. 자고 일어났을 때, 이유 없이 기분이 괜찮다

2. 보기 싫은 사람을 안 만나도 되는 삶이다

3. 좋아하는 걸 살짝 비싸도 살 수 있다

4. 주말에 누워 있는 게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5. 내 기분을 내 힘으로 돌릴 수 있다

6. 누구한테도 설명하지 않고 사는 게 편하다

7. 아무 일 없는 하루가 제일 고맙다


마로니에공원, 대학로


나 역시 대부분 그렇게 살고 있지만, 진짜 잘 사는 사람은 굳이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이미 견고한 평화와 자기만족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 ‘잘 살고 있다는 증거’는 그냥 ‘내 인생, 내 맘대로 산다’가 아닐까.


내 맘대로 자유롭게 사는 것은 더 많이 돈을 벌고 싶은 욕심과 남들보다 더 잘나 보이고 싶은 마음, 즉 부와 명예만 포기하면 된다. 또, 한 해가 가고 있다. 모든 것들은 오고 가고, 또 온다. 어차피 인생은 끊임없는 반복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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