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종의 프리퀄(Prequel)
옛날 옛적보다 더 옛날 옛적, 시골 마을에 한 소녀가 살고 있었어요. 위로는 한 명의 언니, 아래로는 세 명의 여동생과 한 명의 남동생을 둔 소녀. 그땐 다 그랬겠지만, 이 소녀의 부모도 지주는 못돼도 마름질 정도는 할 줄 알았건만... 하필 아부지가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무튼 소녀의 부모는 소작일을 했지만 다행히 성실한 편이었어요. 그래봤자 새는 돈이 없는 정도, 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빠듯했던 고단한 삶이었겠죠.
초등학생이 돼서도 막냇동생을 업고 학교에 가야 했던 언니를 보며, 열아홉의 나이로 쌀 몇 가마니에 이웃마을로 팔려가다시피 시집갔던 언니를 보며, 자기는 절대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다짐했어요. 틈만 나면 서울로 도망갔다 잡혀온 옆집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 나도 서울에 가고 싶다. 이 촌구석 지긋지긋해.
여기 있다간 막내 보다가, 밭일하다가, 적당히 나이 차면 시집에나 팔려가겠지.
어차피 이 집에 나 아니어도 네 명이나 더 있는데 뭐... 나도 언니처럼 살 순 없어!
당연히도 언니처럼, 소녀는 중학교까지만 겨우 나올 수 있었고요. 어차피 공부에는 뜻이 없어 결국 열여덟이 되던 해, 이웃집 소녀와 함께 야반도주를 감행했답니다. 괜히 편지라도 남기면 마음 약해질까 싶어 무작정 옷가지 몇 벌만 챙겨 집을 나서면서도 소녀는 생각했어요.
내가 머리끄덩이 잡혀 돌아오는 한이 있어도, 우리 진이 오빠 얼굴은 꼭 한 번 볼 거야
지역감정이 극에 달했던 그 시절에도 반골 기질이 있었는지, 주변에서 모두 자기 지역 출신인 나훈아를 좋아할 때, 홀로 남진을 사모했던 소녀. 하얀 우비 사이 노란 풍선을 흔들며 서있던 우리 시절의 소녀처럼, 온갖 무시와 핍박에도 '나훈아는 뽕짝 가수고 우리 진이 오빠는 롸큰롤 가수'라며 핏대를 세웠던 그 꼴통 소녀는 새벽안개 헤치며 달려가는 서울행 첫차에 몸을 싣고, 꿈도 실었죠.
숙과 식을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거처는 많지 않았어요. 병원 아니면 여관방. 도저히 피고름은 받아낼 자신이 없었던 소녀는 결국 한 여관방에 취직했고, 이불을 걷고 빨고 널고 개고, 다음 날 다시 걷고 빨고 널고 개고, 서울을 만끽할 새도 없이 2주에 한 번 쉬는 날만을 기다리며 고단한, 하지만 기분은 좋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지요.
내일이면 외출이다! 어디부터 가볼까, 지하철도 타보고 말야 ㅋㅋㅋ
휴가를 하루 앞둔 어느 날, 여관 입구에서 익숙한 사투리가 들렸어요.
아이씨...... 이틀만 늦게 오지! 우리 진이 오빠 발꿈치도 못 봤는데!!!
언젠가 그날이 오겠지, 예상했던 결말이지만 다행히 머리채는 잡혀가지 않았어요. 대신 무거운 침묵만이 가득한 귀향길이었죠. 이윽고 어무이의 입술이 떨어졌어요.
니 아나? 느그 아부지 너 도망간 거 알고 꺼이꺼이 울드라
지 어매 죽었을 때도 저래 울지는 않았는데
어무이도 아닌 아부지가?
큰 언니 시집갈 때도 울기는커녕, 한마디 말도 없이 씁쓸하게 담배만 태우던 우리 아부지가?
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서럽게 울기 시작했어요. 행복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복잡한 감정이었죠.
OO야, 내 니 싸가지 안다. 니가 가장 내를 닮았거든
애비도 너 이 촌구석에서 썩힐 생각 없다
2년만 있다가 △△이(셋째)도 데꼬 가라
달셋방 하나 얻어주꾸마
글고 막내 중핵교부터 돈이 쪼매 든다
느그 둘이 막내 고등핵교까지만 보내라. 알았제?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명이었어요. 오히려 남은 2년은 아주 즐겁고 신나게, 마치 내 고향 땅냄새, 물냄새, 바람냄새 전부를 내 몸에 담아 가져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온갖 일을 도왔어요. 모두의 지지를 받는 서울생활이 눈 앞에 있었으니까요.
달동네 아닌 게 어디냐며 방값이 그나마 저렴했던 대학가에 자리를 잡은 두 자매. 소녀는 (지금은 사라진) 전자회사 공장에, 소녀의 동생은 제약 공장에 모두 취직할 수 있었어요. 자매가 별 수 있나요? 매일 싸우면서도 머나먼 타지에서 의지할 곳은 서로밖에 없었단 것을. 서울 남자 한 번 만나서 찐하게 연애해 보고 싶었던 소녀와 달리, 동생은 데모인지 뭐시기인지에 빠져 밤 열 시가 넘도록 늦기 일쑤였죠. 동생이 늦는 날엔 걱정스런 마음에 제약 공장까지 좇아가 동생을 데리고 함께 집으로 오는 날도 늘어만 갔어요.
아...... 동생 년이 전경에 잡혀가든, 인신매매를 당하든 그 공장에 가는 게 아니었는데......
먼 훗날, 소녀는 제약 공장을 찾았던 그날 밤을 몹시도 후회했답니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