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
해묵은 감상평을 뜬금포로 올리는 것이 맞나 고민했지만, '누군가 검색이라도 해서 이 영화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수집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ㅋㅋㅋ 맥락 없이 재발행합니다.
이 글은 영화 「오펜하이머」(2023)에 대한 메가톤급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를 안 보았는데 보고 싶은 분이라면 제 글 따위는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보셨어도 여전히 제 글 따위는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배대웅 작가님, 방대한 댓글을 날려 송구합니다 ㅠㅠ)
때늦은 감상평이지만, 이 영화를 보고 손끝이 간질간질거린다. 과문한 과학지식 탓에 이 영화를 100% 다 이해한 것은 아니다. 100%? 그래, 그러고 보니 이 영화는 과학도, 인간도 결국 100%라 단언할 수 있는 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가능성이 0이냐 묻는 군인의 질문에 언제나 near 0로 답하는 과학자들처럼 말이다) 과학 무지렁이의 <오펜하이머> 감상평에 대한 변명과 양해는 이 정도로 구하기로 한다.
이 영화를 보기 전, 많은 유튜브 콘텐츠를 섭렵하며 철저히 예습을 했건만 영화는 단번에 이해되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유튜브와 브런치의 많은 콘텐츠를 보고 나서야 그나마 조금 해석이 되는 듯했다. 뼛속까지 문과생인 내가 이 영화를 해석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가당치도 않다. 그래서 온전히 감상에만 집중해 보련다. 이 영화의 맥락과 해석의 깊이를 탐닉하고 싶다면, 나의 글벗 배대웅 작가님의 글을 적극 추천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의 불을 훔쳤다. 그리고 그것을 인간에게 주었다.
이로 인해 그는 바위에 쇠사슬로 묶인 채 영원히 고문을 받아야 했다.
나는 이 영화를 관통하는 한 가지 정서를 꼽으라면 '죄책감'을 택하겠다. 오펜하이머를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 부르는 것이 단순히 불(원자폭탄)을 인류에게 선물한 프로메테우스와 유사한 행적만을 근거로 들 수 없을 것이다. 본인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어떤 식으로 지는지, 그 책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이런 감정의 흐름까지 감안해야 비로소 오펜하이머를 프로메테우스로 비유한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
이 감정의 흐름을 좇아가다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오펜하이머는 진정한 프로메테우스가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고 만다.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쳐다 준 대가로 카즈베기 산에 묶여 독수리로부터 간을 쪼이며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지만, 그 어떤 죄책감에도 시달리지 않았다. 오히려 묵묵하게, 당당하게 형벌을 견뎌냈다. 자신의 손으로 만든 인류가 더욱 번영하려면 그 어떤 고난도 감수하겠다는 결연함, 그리고 대의가 그 모진 고문을 버텨낼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프로메테우스가 헤파이스토스와 제우스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고자 할 때, 그의 관심사는 오직 추위를 견뎌내고 화식(火食)을 가능케 함으로써 더욱 번영할 인간에게만 집중돼 있었다. 그 불로 남의 재산을 태우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프로메테우스의 의도에서 크게 벗어난 일이었다. 그저 인간들의 악의(a.k.a. 제우스의 저주)에서 비롯한 것일 뿐.
위대한 신, 프로메테우스에 비유되는 한 인간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는 순수히 학문을 동경한 탐구자였지만, 동시에 야심가이기도 했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맡기기에 당신은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고 도발하는 그로브스의 질문에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받을 것이라고 농담 같은 진담을 하는 걸 보면 말이다.
나는 그래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로서의 오펜하이머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공감할 수는 없었다. 이미 그는 원자폭탄의 가공할 만한 위력과 파국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아인슈타인과의 대화에서 한 번, 보어와의 대화에서 또 한 번, 실라르드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한 번,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명분에 대한 도전에 직면한다.
물론 그는 철저히 외면하는 쪽을 택했다. 비로소 원자폭탄이 열도에 닿아 터진 후에야,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만다.
이후 그는 수소폭탄 개발과 더 이상의 핵무기 확산을 반대하고 나서는 것으로 본인의 죄책감을 털어내려 한다. 하지만 이때부터의 행보는 실로 “징징거리는 어린애” 같다. 프로젝트 성공의 광분에 휩싸여 희생자를 기리기는커녕 패전국을 조롱하는 스피치에 나섰고, 대통령과의 독대라는 귀한 시간을 얻어놓고선 그 어떤 현실적인 대안 하나 관철시키지 못하고 자리도, 체면도 잃고 말았다. 그는 애초에 야심가가 되기엔 턱없이 모자란 사회성과 정무적 감각을 가졌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오펜하이머 =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세간의 평가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는 이유를 길게도 써봤다. 물론 오펜하이머가 스스로를 프로메테우스에 비견한 것은 아닐 테다. 다만, 대의를 위해 그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견뎌낸 신과, 오로지 죄책감을 덜어내고자 스스로를 순교자 프레임에 가둬놓고 모욕을 참아낸 인간을 동일한 잣대로 비교할 수 있을까. 결과론적으로도 오펜하이머의 원자폭탄은 프로메테우스의 불보다 인간을 훨씬 고통받게 했으니 말이다.
세상이 당신에게 누명을 씌우고, 빨갱이라는 깃털로 뒤집어씌우는데
당신은 그저 당하고만 있으면 이 세상이 당신을 용서할 거라고 생각했어? 아니야.
(극 중 오펜하이머 아내 '키티'의 대사)
맞다. 중요한 것은 죄의식을 탕감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의 명예를 위한 최소한의, 최후의 투쟁심이어야 한다. 청문회장에서 벌거벗겨진 오펜하이머보다, 벌거벗은 채로 불륜녀와 섹스하는 장면을 목도한 키티에게 나는 더욱 큰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오펜하이머는 어렴풋이 프로메테우스의 심정은 느꼈을지 몰라도, 심장만은 절대로 가지지 못했다.
이 영화는 과학사 측면에서도 볼거리가 풍부하지만, 100%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다층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앞서 살펴본 죄책감의 씨앗은 모두 오펜하이머 스스로 뿌린 것이다. 영화 후반부를 지배하는 오펜하이머와 루이스 스트로스의 청문회를 보면, 그저 인과응보라는 상투적인 표현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나는 스트로스라는 캐릭터에 공감은 못해도 훨씬 납득이 가기도 한다. 그는 인간의 단선적인 감정을 순수하게, 하지만 특유의 대범한 스케일로 발현해 냈다. 그것은 바로 열등감에서 비롯한 질투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보통 '유치하다' 일컫지만, 나는 이런 사람들이 자기감정에 충실하고, 모순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대단하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다.
영화에서 오펜하이머는 회의장에서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여주지 않는 에드워드 텔러에게 남아서 수소폭탄을 연구할 기회를 준다. 아무것도 모르는 군인이라고 소개하는 그로브스에게는 MIT 공대출신 아니냐며 그의 의견을 끝까지 존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 스트로스와의 첫 만남에서 오펜하이머는 그를 굳이 '미천한' 구두공이라 부른다. 이후 스트로스는 오스트리아에 방사성 동위원소 수출 여부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한 번 더 오펜하이머로부터 조롱과 능욕을 당한다.
이런 모욕을 받고도 복수하고 싶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으랴. 물론 대부분의 인간들은 이럴 경우 직접 복수에 나서기보다 그저 상대방의 불행을 바라는 편에 서겠지만, 스트로스는 치밀하게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적절한 배역을 캐스팅해 한 편의 완성도 높은 복수극을 완결해 낸다. '처벌하는 것이 아닌, 몰아내는 것'이라는 집필 의도를 완벽히 달성했을뿐더러, '복수의 끝은 자신의 몰락'이라는 권선징악 엔딩의 클리셰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해 냈다. 지극히 인간적이지 않은가.
오펜하이머는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던, 어쩌면 절벽 아래로 밀어버린 스트로스에 비해 훨씬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인물이다. 공산주의자를 연인으로, 동료로, 아내로 맞아들이면서도 그를 공산주의자라며 내치려는 조국을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는다. 과학자들을 한없이 존중하지만, 과학을 모르는 이들은 업신여긴다. 유부녀를 유혹해 자신의 아내로 만들지만, 정작 자신은 싱글일 때부터 만났던 연인을 내연녀로 만들어 버린다. 심지어 내연녀를 잃은 고통을 아내에게 위로받고자 한다.
사람은 늘 변하지만, 또 절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늘 변한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는다. 이렇듯 세상에서 가장 모순적인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때에 따라 내로남불을 시전하고,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한 인간, 오펜하이머 역시 지극히 인간적이지 않은가.
결국 연역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인간도, 하나의 실로 꿸 수 없는 모순적인 인간도 모두 인간적이라는 모순. 크리스토퍼 놀란이 이 영화를 통해 들려주고 싶은 수많은 메시지 중에 하나를 내가 잘 잡아내었는지 모르겠다.
글을 다 쓰고 보니 '느님'(ex_유느님)과 '갓(God)'(ex_갓경규)이 남발되는 요즘시대에, 오펜하이머에게만 유독 가혹한 신의 기준을 들이댄 것만 같아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단언컨대 그의 치적과 굴곡진 인생사는 신처럼 대단하고도 스펙터클하다. 대작을 N회차 관람하는 것은 너무나도 기빨리는 일이라 내게는 잘 없는 일이지만, 이 영화만큼은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다. 신화만큼은 언제 봐도 재밌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