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의 평화주의

논리적인 아무 말 대잔치

by 로미코샤Romicosha

최근에 저는 두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정확히는, 어제 저녁 마트에서 사 온 찌개용 두부를 칼로 썰다가

그 매끄럽고도 저항 없는 단면에서

어떤 지독한 평화주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최근 마주친 세상이 너무 날 서 있어서,

상대적으로 모서리가 순한 두부에게 위로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두부는 인류가 발명한 식재료 중 가장 '간디'에 가까운 존재다.

콩이라는 단단한 자아를 갈고 닦아,

응고제라는 외부의 압박을 받아들이면서도

결코 타인을 찌르지 않는 부드러운 직육면체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비폭력 불복종의 미학이다.

칼날이 들어와도 두부는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그저 슥, 하고 자기 몸을 내어주며 단면을 보여줄 뿐이다.

마치 "당신이 나를 베어도 나의 본질인 단백질 성분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물론 두부가 진짜로 이렇게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인문학적으로 보자면 두부는 '액체와 고체 사이의 중용'을 실천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의 덕이 식탁 위에 구현된 셈이다.

너무 단단해서 치아를 공격하지도 않고,

너무 무른 액체여서 형체를 잃지도 않는 그 절묘한 지점.

이것이야말로 극단을 경계하는 동양 철학의 정수가 아닐까?

공자가 두부를 즐겨 먹었다는 기록은 본 적 없지만,

만약 그가 마트 시식 코너에 있었다면 분명 두부 부침 앞에서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냥 내 상상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두부의 평화는 '무력함'이 아니라 '포용력'에서 온다는 사실이다.

김치찌개에 들어가면 붉게 물들고,

간장 양념을 끼얹으면 검게 동화된다.

자기 색깔을 고집하며 국물 맛을 망치는 법이 없다.

이건 거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유연함이다.

경계가 모호하고, 타자와의 혼종성을 즐기는 태도.

나도 두부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두부 한 모를 냄비로 옮기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내 손가락의 미세한 힘 조절 실패로

두부의 오른쪽 모서리가 툭, 하고 떨어져 나갔다.

평화의 상징이 순식간에 처참한 잔해로 변했다.

나의 서툰 손길 한 번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도, 간디의 비폭력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유연함도 전부 으깨져 버린 것이다.

그것은 평화의 붕괴였고, 질서의 종말이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두부 조각을 보며

평화주의자의 최후가 얼마나 허망한지 깨달았다.

남을 찌르지 않기로 결심한 존재는

결국 남의 손가락 끝에서도 쉽게 으스러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세상은 두부의 부드러움을 칭송하지만,

동시에 그 부드러움을 이용해 너무 쉽게 상처를 낸다.


으깨진 두부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결국 평화란 지키는 것이 아니라

부서지지 않게 조심조심 옮겨야 하는 유리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아니, 유리는 너무 날카로우니 역시 두부 같은 것이라고 해야겠다.

잘 정돈된 평화는 아름답지만,

한 번 뭉개진 평화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비참한 콩 비지가 될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바닥에 떨어진 두부 조각을 치웠다.


아무튼 결론은 하나다.


두부는 찌개에 넣어도, 조림을 해도, 그냥 간장에 찍어 먹어도 맛있다.

그게 두부의 평화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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