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적인 아무 말 대잔치
최근에 저는 종이 쇼핑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정확히는,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오는데
종이 손잡이가 파르르 떨리는 그 불길한 진동에서
어떤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느꼈기 때문이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내가 들고 있는 것보다 세상이 항상 조금 더 무겁다는 사실을
쇼핑백이 먼저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종이 쇼핑백은 존재 자체가 '시한폭탄'이다.
비닐봉지가 끈질긴 생명력으로 환경을 파괴한다면,
종이백은 깃털 같은 연약함으로 인간의 정신력을 파괴한다.
이것은 거의 하이데거가 말한 ‘피투성(Thrownness)’의 현신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거친 세상(마트 계산대)에 던져졌고,
담긴 물건의 무게라는 ‘실존의 하중’을 오직 두 줄의 종이 끈으로 버텨내야 하는 운명.
(그렇다고 종이백이 철학적 고뇌를 하는 건 아니다.)
인문학적으로 보자면 이건 ‘장력(Tension)의 비극’이다.
우유 1리터와 냉동 피자, 그리고 무거운 오렌지 한 봉지를 담은 순간,
쇼핑백은 이미 자신의 임계점을 넘어서는 초월적 고통의 단계에 진입한다.
이때 손잡이 부근에서 들리는 ‘찌익-’ 하는 미세한 소리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이 내뱉는 마지막 독백과도 같다.
“나의 운명은 여기까지인가, 아니면 주차장까지인가.”
나는 이 소리를 ‘종이의 단명론’이라 부르기로 했다.
(물론 물리학적으로는 그냥 인장 강도의 문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불안한 구조가 우리를 강제로 '에코백 전도사'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종이백의 부실함은 사실 고도의 심리 작전일지도 모른다.
한 번 찢어져서 아스팔트 위에 계란을 투척해 본 사람만이
비로소 에코백이라는 견고한 구원을 갈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련을 통해 신앙을 갖게 되는 종교적 회귀와도 닮아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최대한 경건한 자세로 쇼핑백의 밑바닥을 받쳐 들었다.
손잡이만을 믿는 오만을 버리고,
이 연약한 존재의 고통을 분담하기로 한 것이다.
주차장까지만 버텨준다면
집에 가서 이 쇼핑백을 종이 재활용함이라는 안식처로 보내주겠노라 다짐했다.
그런데 그 순간
오른쪽 손잡이에서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소리가 들렸다.
‘찌익.’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이런 순간을
‘페리페테이아(운명의 급전)’라고 부른다.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꺾이는 지점이다.
내 쇼핑백에게도 바로 그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잡이를 다시 움켜쥐었지만
이미 늦었다.
종이 섬유 사이에서 일어난 미세한 파열은
도미노처럼 번져 나갔고,
마침내 운명의 실타래가 끊어지듯
손잡이 하나가
툭, 하고 떨어졌다.
이후의 전개는 너무나 예측 가능해서
오히려 장엄했다.
쇼핑백이 한쪽으로 기울고,
오렌지가 둥글게 굴러가고,
우유팩이 위엄 있게 넘어지며,
냉동 피자가 아스팔트 위에
부조리극의 무대장치처럼 펼쳐졌다.
그것은 작은 식료품 사고였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거의 문명의 붕괴에 가까웠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깨달았다.
인간은 늘 손잡이를 믿는다.
두 줄의 종이 끈이
자신의 하루를 안전하게 집까지 운반해 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렇듯
생각보다 조금 더 무겁고,
종이는 언제나 생각보다 조금 더 얇다.
그래서 인생의 많은 사건들은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대개 이런 방식으로 시작된다.
손잡이 하나가
갑자기 끊어지는 방식으로.
나는 바닥에 흩어진 오렌지들을 보며 깨달았다.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과
식재료의 안전 사이에서 갈등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은
결국 길바닥에 쪼그려 앉아 오렌지를 줍는 뒷모습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무튼 결론은 하나다.
쇼핑백은 그냥 튼튼한 에코백이 최고다.
그게 종이백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