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속이 눅눅해져 버리는 밤

감정을 말리는 밤

by 로미코샤Romicosha

오늘은 아무것도 안 했다.


정확히는, 뭔가는 했지만

아무것도 안 한 것처럼 느껴진다.


설거지를 했고,

빨래를 돌렸고,

밥도 먹었다.


하지만 하루가 끝날 때쯤

"오늘 뭐 했지?" 하고 물으면

대답할 게 없다.


그런 날이 있다.







저녁 9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어제 말렸던 이불이었다.

햇빛도 받았고, 바람도 쐬었고,

손으로 만져봤을 때 보송했다.


그런데.

눕자마자 알았다.

이불이 다시 눅눅하다.


왜?


날씨 앱을 확인했다. 습도 42%.

적정 수준이었다.


창문도 닫혀 있었고,

물을 쏟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눅눅했다.


이건 물리적인 문제가 아니다.

내가 들어가니까 눅눅해진 거다.


아니, 정확히는

내 안에 있던 뭔가가 이불로 스며든 거다.


감정의 습기.


오늘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 기분,

하루가 텅 빈 것 같은 느낌,

뭔가 놓친 것 같은데 뭔지 모르는 불안.


그런 것들이 천천히 배어 나온다.


이불속은 안전지대다.

하지만 가끔은 그래서 위험하다.


안전하니까 방심하고,

방심하니까 감정이 새어 나오고,

새어 나온 감정은 이불을 적신다.


나는 이불을 다시 만져봤다.


겉은 괜찮았다.

하지만 속은 눅눅했다.


이걸 어떻게 말려야 하지?


밖에 널 수도 없고,

건조기에 넣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덮고 잘 수도 없는.








가만히 누워 있었다.


천장을 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이상한 냄새가 났다.


포도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달콤한데 시큼한,

뭔가 익숙한데 낯선.


코를 킁킁거렸다.


어디서 나는 냄새지?


이불 끝을 들춰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베개를 확인했다.

역시 없었다.


그냥 냄새만 있었다.

잠깐 있다가 사라졌다.


이상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불속에는 원래 이상한 게 많이 산다.

츠키마루처럼.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츠키마루가 이불 모서리에서 올라왔다.


역시 무표정이었다.


나는 말했다.

"이불이 또 눅눅해졌어."


츠키마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손을 뻗어서 이불 한쪽을 잡았다.


그리고 살짝 들어 올렸다.


공기가 들어왔다.


아, 환기.


이불을 말리는 게 아니라

바람을 통하게 하는 거였다.


츠키마루는 이불을 다시 내려놓고,

이번엔 반대쪽을 들어 올렸다.


또 공기가 들어왔다.


그렇게 몇 번 반복했다.

들었다 놓고, 들었다 놓고.


나는 가만히 누워서 그걸 봤다.








이불이 완전히 마르진 않았다.

여전히 속은 눅눅했다.


하지만 조금 숨통이 트였다.


츠키마루가 멈췄다.

그리고 내 옆에 앉았다.


표정은 없었지만,

그 무표정 속에는 확실히 이렇게 쓰여 있었다.


"완전히 말려야 할 필요는 없어요."


맞다.


조금 눅눅해도,

조금 불편해도,

오늘은 이대로 자도 괜찮다.

내일 다시 말리면 되니까.


나는 눈을 감았다.

포도 냄새가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내일이면

조금 마를 테고,


모레면

조금 더 마를 테고,


완전히 마르지 않아도

그냥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츠키마루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거다.


오늘 하루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이불을 매일 말릴 필요는 없다. 그리고 가끔은, 그냥 젖은 채로 있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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