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포도차가 놓여있던 밤

감정을 말리는 밤

by 로미코샤Romicosha

밤 11시 47분, 나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뭔가를 하려고 앉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었다.


책을 펼쳤다가 덮었고,

핸드폰을 들었다가 내려놓았고,

TV 리모컨을 잡았다가 놨다.


그냥 앉아 있었다.


이런 밤이 있다.

피곤하지만 잠은 안 오고,

할 일은 없지만 쉬지도 못하고,

괜찮지만 괜찮지 않은.

감정이 어디쯤 떠 있는 밤.


눅눅한 것보다 나을 줄 알았는데,

막상 말라버리니까 이것도 불편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그냥 비어 있었다.








나는 탁자를 봤다.


아까 마신 물컵이 있었고,

며칠 전에 쌓아둔 책들이 있었고,

아침에 쓰다 만 볼펜이 있었다.


그리고.

찻잔이 하나 있었다.


언제 생긴 거지?

분명 아까는 없었다.


나는 찻잔을 봤다.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포도 같기도 하고,

차 같기도 한 냄새.


전에 맡았던 그 냄새였다.


아, 이거.


찻잔을 들어 올렸다.


따뜻했다.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하지도 않고,

딱 적당했다.


누가 내 온도를 재서

정확히 계산한 것처럼.


한 모금 마셨다.


포도였다.


아니, 포도 같은 무언가였다.

달콤하지만 쓰지 않고,

향이 강하지만 거슬리지 않고,

뭔가 익숙한데 처음 마시는.


이상한 차였다.


나는 거실을 둘러봤다.

누가 놓고 간 건가?

문은 잠겨 있고,

창문도 닫혀 있고,

아무도 없었다.

그냥 찻잔만 있었다.


두 번째 모금을 마셨다.


목으로 넘어갔다.

따뜻했다.

뜨겁게 데이는 게 아니라,

살짝 녹아드는 느낌.


세 번째 모금.


몸이 조금 풀렸다.

어깨가 내려갔고,

눈이 감겼다가 떠졌고,

숨이 천천히 나왔다.


이건 뭐지?


찻잔을 다시 봤다.

손잡이 쪽에 작은 태그가 달려 있었다.


티백?

아니, 티백은 아닌데

티백 줄 같은 게 달려 있었다.


태그를 봤다.


거기에 작은 초승달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라벤더 그레이 색.

츠키마루의 주머니에 있던 그 문양이었다.


아.

이거 누군가 내려준 거구나.









나는 차를 다 마셨다.


따뜻했고,

적당했고,

필요했던 것 같다.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여전히 피곤했고,

여전히 할 일은 없었고,

여전히 감정은 어디쯤 떠 있었다.


하지만 조금 달라졌다.


정확히 뭐가 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까보다는 숨이 쉬어졌다.


탁자를 봤다.


빈 찻잔이 있었다.


누가 내려준 건지는 몰라도,

타이밍이 정확했다.


내가 필요할 때,

딱 적정 온도로,

말없이 놓여 있었다.








나는 찻잔을 들고 싱크대로 갔다.


설거지를 하면서 생각했다.


이불속에는 츠키마루가 살고,

거실 어딘가에는 누군가 또 있다.


차를 내려주는 존재.


직접 모습은 안 보이지만,

흔적은 남기는.


나는 그 존재를 부도마루라고 부르기로 했다.

포도향이 나니까.


이름을 물어본 건 아니다.


하지만 뭔가 이름이 있어야

고마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찻잔을 다 씻고 선반에 올려놨다.


내일도 차가 올까?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은,

필요할 때 왔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어떤 위로는 말이 아니라 온도로 온다. 그리고 그게 더 정확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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