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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쟈 Jun 24. 2020

가족이란 무엇인가?

영화 <어느 가족> 리뷰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주연: 죠 카이리(쇼타), 사사키 미유(유리), 키키 키린(하츠에), 릴리 프랭키(오사무), 안도 사쿠라(노부요), 마츠오카 마유(아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영화는 한 슈퍼마켓에서 시작한다.

동네에 흔히 있을 법한 장소에, 그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자(오사무)와 소년(쇼타)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들의 행동이 심상치 않다. 알 수 없는 수신호를 몇 번 주고받은 뒤 목표한 물건들을 정확하게 가방 속에 옮겨 담아 유유히 그 자리를 빠져나온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훔친 물건을 가지고 집으로 오는 길, 따뜻한 크로켓을 먹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본 오사무가 ‘눈이 올 것 같다’고 말하지만, 그날 밤 눈은 오지 않는다.


왜 오사무는 ‘눈’을 언급했을까? 일반적으로 눈을 생각하면 순백의 깨끗함을 떠올린다. 눈은 모든 것을 다 덮어 그 아래 무엇이 있든지 상관없이 하얗고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다. 어둠이 물러가고 햇빛이 나오는 순간, 눈 속에 덮여 있던 것들은 다시 드러나기 마련이다. 어딘가 조금은 부족해 보이지만 다정하고 화목한 가족이라는 외피로 가려져 있던 그들이, 외부로부터 온 힘에 의해 벗겨져서 해체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에서 실제로 눈이 등장하는 것은 모든 비밀이 다 드러난 뒤이다. 가족이 각자의 길을 가게 되고, 나중에 다시 만난 오사무와 쇼타는 눈사람을 만들며 진짜 아버지와 아들처럼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그러나 행복한 순간은 아주 짧다. 그들이 만든 눈사람이 다음날 아침 햇빛에 녹아내리 듯이, 그들의 부자관계도 그렇게 끝이 난다. 


학대당하고 쫓겨나서 밖에서 떨고 있던 소녀(유리)가 오자, 그녀가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에 반대하던 쇼타는 집을 나온다. 오사무는 쇼타의 아지트로 그를 데리러 가고 쇼타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스위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스위미’는 작은 물고기들이 모여서 큰 참치를 물리치는 내용인데, 작은 물고기들이 왜 그러는 것일까?라고 묻는다. 오사무는 ‘참치가 맛있기 때문’이라는 엉뚱한 대답과 함께 큰 참치가 되어서 쇼타를 잡는 흉내를 낸다. 익스트림 롱 쇼트로 촬영된 이 장면은 깊은 밤 푸르스름한 조명으로 인해 마치 심해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모습처럼 보이게 한다. 관객들은 이 장면에서 그들 가족의 형태가 마치 스위미 속 작은 물고기들과 유사하다는 점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쇼타가 읽어주는 ‘스위미’에 대한 책의 내용 중, “절대 흩어지면 안 되고 각자 위치를 지켜야 한다는 것, 모두가 한 마리의 물고기처럼 헤엄치게 됐을 때, 내가 눈이 될게”라는 구절은 그들 가족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스위미’ 속 작은 물고기들처럼, 각자의 정해진 역할이 있으며 이를 잘 수행해야만 가족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작은 물고기가 모여 큰 물고기처럼 헤엄치는 것이 영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가족이 해체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처럼 보인다.


쇼타는 ‘스위미가 왜 그러는 것일까?’라고 질문하는 아이이다. 

그의 질문은 그가 속한 가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밖에 없다. 

가족의 일원이 되기 위해 물건을 훔치는 행위에 가담해야만 한다는 것. 

그것은 어린 유리에게도 예외는 없다. 

그것을 인식한 순간 쇼타는 이 가족이 해체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스위미에서 ‘눈’이 된 물고기가 바로 ‘쇼타’였기에 이 가족의 해체를 결정하는 것도 쇼타인 것이다. 


쇼타는 오렌지 한 봉지를 훔쳐서 쫓기다 다리 밑으로 뛰어내리는데, 그의 추락 후 장면에선 바닥에 떨어져서 굴러가는 오렌지와 다리 밑을 내려다보는 점원의 모습만 보여줄 뿐 떨어진 쇼타의 모습은 의도적으로 생략된다. 감독은 왜 떨어진 쇼타의 모습을 생략함으로써 관객들에게 그가 죽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걸까? 


일반적으로 가족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태어난 순간 가족은 이미 정해져 있고, 죽을 때까지 그 역할은 끝나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관계가 죽어야만 끝나는 것이라면, 영화 속 가족의 해체를 위해서는 그것을 결정한 쇼타의 죽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다리 아래로 떨어진 쇼타가 죽은 것처럼 보이는 순간, 즉 스위미 속의 자신의 위치에서 이탈하고 죽음을 선택한 순간, 마치 가족처럼 보이던 그들이 해체되는 단계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족 공동체를 해체하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 물건을 훔치지 않아도 되고 학교에도 다닐 수 있는 ‘쇼타’가, 다시 부모에게로 돌아간 ‘유리’의 모습이, 마냥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제 아버지를 그만두고 아저씨를 하겠다는 오사무에게, 그가 듣고 싶어 했으나 끝내 말하지 않았던 ‘아빠’라는 말을 들리지 않게 하는 쇼타의 마음, 그리고 쇼타에게 받은 구슬을 그들에게 배운 방식으로 세어가면서 놀던 유리가 베란다 밖을 내다보는 마지막 엔딩 장면은 안타까운 마음을 자아낸다.


영화는 이 불완전한 가족을 시종일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진짜 가족에게 버림받은 그들이 서로를 가족으로 ‘선택’ 하였을 때 그들은 늘 함께 있었다. 유리에 대한 실종 수사가 시작된 것을 뉴스를 통해 접한 후, 유리가 처음에 입고 있던 옷을 태운다. 이 장면은 마치 유리의 과거를 태우고(화장하고), 새로운 사람(린)으로 태어나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유리의 옷을 태우는 사람이 바로 유리의 어머니 역할을 하게 되는 노부요다. 

<출처: 네이버영화 스틸컷>

그녀는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이제 린이 된 유리에게 ‘사랑해서 때린다는 것은 거짓이라며 사랑한다면 이렇게 하는 거야’라며 그녀를 꼭 껴안고 눈물을 흘린다. 

옷을 태우는 불빛이 아른거리고 꼭 껴안고 있는 노부요와 린 뒤로 나머지 가족들이 따뜻한 눈빛으로 그들을 지켜보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불꽃놀이를 소리로 감각한다. 행복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하는 작은 순간의 추억이라는 듯이, 그들은 조그마한 마당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렇게 그들은 보이지 않는 행복한 순간을 함께 나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불완전한 가족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게 되는 이유는 버림받고 상처 받은 그들이 서로를 위로하는 모습이 ‘진짜’ 가족처럼 보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해체되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서로가 여전히 가족으로 남은 그들, 그렇다면 과연 진짜 가족이란 무엇일까?  


<출처: 네이버영화 스틸컷>

영화 속 할머니(하츠에)는 역할은 독특하다. 실질적인 집주인이기도 하면서 모든 관계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지만 그녀의 모습은 현실이라는 땅에 굳건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모습은 아니다. 하츠에 역을 연기한 키키 기린 여사의 유작이라는 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녀의 모습은 어쩐지 이승과 저승의 중간쯤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 공동체가 가족과 남의 중간지대에 위치한 것과 마찬가지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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