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장편소설
[단상]
2020년에 아마 가장 사랑받은 소설 중 하나 일 것이다. 이상하게 베스트셀러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데 재미있게 읽었다는 지인의 추천을 받아 지난달에 읽게 되었다. 제목만 보고는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시작되는 어떤 에피소드 인가?’ 생각했는데, 심시선이라는 한 여성으로부터 뻗어져 나온 가지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무료한 주말에 잠깐 읽으려고 펼쳐 들었다가 결국 마지막 장까지 읽은 뒤에 책을 덮게 되었다. 많은 등장인물로 초반에 헷갈리던 것도 잠시, 이 모든 일들이 어떻게 끝나게 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책의 끝까지 이어져 나갔다. 다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에피소드들이 너무 짧고 금방 다른 사람으로 넘어가는 옴니버스 형식이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이번에 북클럽을 위해 다시 읽으면서 각자가 가진 개성과 스토리에 조금 더 다가가고 공감할 수 있었다. 드러난 부분에 가려져 있는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들이 나의 상상력 속에서 여러 가지로 펼쳐졌다. 재미있는 것은 시선과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은 두 명의 여성, 난정과 경아에게서도 시선으로부터 받은 것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혈연, 유전보다 더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북클럽에서 “어째서, 하와이 그리고 제사라는 형식을 빌려야 했는가?” 하는 질문이 있었다. 이 질문을 받고 하와이라는 장소가 우리에게 주는 정서는 어떠한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파라다이스, 환상의 섬이면서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곳, 우리의 과거와 연결된 곳. 심시선 여사가 한국을 벗어나 처음으로 발을 디딘 곳,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 곳 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제사’라는 것은 구태의연한 어감을 지니고 있다. 이 책에서 그런 제사의 형식을 비틀어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책의 시작 부분에 1999년 TV 토론에서 제사 문화에 반대하는 심시선 여사의 말, “형식만 남고 마음이 사라지면 고생일 뿐입니다. 그것도 순전 여자들만. 우리 큰딸에게 나 죽고 절대 제사 지낼 생각일랑 말라고 해놨습니다. (중략) 선생 생각이랑 내 생각이랑 어느 쪽이 더 오래갈 생각인지는 나중에 사람들이 판단하겠지요.”을 소개하며 시작하였으나. 그녀의 딸 명혜는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시선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명혜가 제시한 제사의 방식은 ‘형식은 사라지고 마음이 남는’ 것이었으니 어떤 면에서는 시선의 생각에 부합한 것일 수도 있겠다.
책을 읽는 동안, 무엇이든 일단 시작하면 진심을 담는 이들이 행동과 가족들 간의 밀도 높은 대화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내내 말없이 잠을 자는 화수 조차도 침묵 속에 더 많은 말을 담고 있다. 내내 눌러 담은 화수의 마음이 마지막에 흘러나올 때, 그것이 부풀대로 부풀어 올라 터져버리는 풍선 같은 것이 아니고 풍선의 입구로 조금씩 흘러나오는 바람 같아서 좋았다.
하와이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속 그들은 떠나올 때와 비슷한 모습이지만 조금씩은 다 달라져 있고, 서로에게 한 발씩 더 가까이 다가가 있어서 안도감이 들었다.
[발췌]
심시선: 아이, 남편들이랑 무슨 대화를 해요? 그네들은 렌즈가 하나 빠졌어. 세상을 우리처럼 못 봐요. 나를 해칠까 불안하지 않은 상대와 하는 안전한 섹스, 점점 좋아지는 섹스 정도가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P20)
“기일 저녁 여덟 시에 제사를 지낼 겁니다. 십 주기니까 딱 한 번만 지낼 건데,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P83)
“힘 때문도 아니야. 각도 때문도 아니야. 할머니한테 던지기 전에 갈아뒀던 거야.”
“설마 ……”
“할머니는 그 정도의 악의는 상상하지 못했던 거야. 그런데 우리는 할 수 있지, 21세기 사람들이니까. 그런 악의가 존재한다는 걸 알지.”
우윤은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화수의 말이 맞으리란 것을 뒤따라 깨달았다. 전공은 조소였지만 유화 나이프도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건 팔에 박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모든 일이 너무 반복된다는 생각 들지 않아?” (P143)
“제국주의의 얼굴은 왜 다 닮았을까?”(중략)
“응, 제국주의는 일종의 처리 공정이었던 것 같아. 매번 같은 일이 벌어졌어. 질릴 정도로 똑같은 얼굴이야.”(P233-234)
여전히 깨닫지 못한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날은 바람 한 줄기만 불어도 태어나길 잘했다 싶고, 어떤 날은 묵은 괴로움 때문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싶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그런 고민을 하겠지요. 철쭉은 그런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을 겁니다. 오로지 빛에만 집중하는 상태에 있지 않을까,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철쭉의 마음을 짐작해 봅니다. 바깥의 빛이 있고 안의 빛이 있을 터입니다. (P280-281)
빛나는 재능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P288)
이제는 이름도 잊은 여자들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하와이에는 진주 음식을, 순천 음식을, 또 해주와 안주 음식을 재현하려는 아주머니들이 살았다. 아주머니들의 이름은 잊고도 음식 맛은 가끔 혀끝에 돈다. 내가 먹었던 한식 중에 가장 대단했던 것은 그때 먹었던 것이다. 그 친절을 어찌 잊고 있었을까? 그렇게 다른 재료로도 익숙한 음식을 만들어 막 도착한 이를 살찌우려 했던, 월세 걱정을 하면서도 어려운 고국에 돈을 보내던 사람들을. 이제 내가 그 아주머니들보다 나이가 많은데, 나는 영영 음식을 못하는 사람으로 남았으니 비척거리는 젊은이가 찾아와도 먹일 것이 없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손맛이 생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무것도 당연히 솟아나진 않는구나 싶고 나는 나대로 젊은이들에게 할 몫을 한 것이면 좋겠다. 낙과 같은 나의 실패와 방황을 양분 삼아 담은 세대가 덜 헤맨다면 그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P298-299)
“그 점은 나도 싫은데 외부 충격에 영향받지 않는 인생이 어딨겠어? 그렇지만 내가 그날 이후로 곱씹고 있는 건 내 불행, 내 상처가 아니야. 스스로가 가엽고 불쌍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고. 그 보다는 세상의 일그러지고 오염된 면을 너무 가까이서 보게 되면, 그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는 거야. 그걸 설명할 언어를 찾을 때까지는. 어떤 건지 이해가 가? 내가 찾아야 할 걸 찾는 동안, 계속 옆에 있고 싶어? 그럴 수 있겠어?”(P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