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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쟈 Jun 18. 2019

'통속성' 대한 새로운 발견

권여선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 중 『이모』 서평.



안녕 주정뱅이는 [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한 권여선의 여섯번째 소설이며, 제 47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책이다. 2013년 여름부터 2015년 겨울까지 발표한 일곱 편의 단편소설을 한권으로 엮었으며, 책의 제목은 주인공들이 술을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는 공통점에서 정해졌다.   

그 중 세 번째 단편인 ‘이모’는 막 결혼한 소설가 지망생인 화자가 결혼 전에는 존재조차 몰랐던 ‘시 이모’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그녀는 2년간 모든 가족과 연락을 끊고 살다가 췌장암 말기의 환자로 다시 나타난다. 병문안을 온 화자에게 자신을 ‘이모’라 부르라하며  집으로 초대하고, 화자는 주기적으로 그녀를 방문하면서 삶에 대한 기억을 함께 나누게 된다.이모는 삶의 대부분을 가족들에게 저당 잡혀 살아오다가 한계에 다다른 순간 모든 관계를 끊고 혼자 생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막상 안개 낀 평원처럼 드넓게 펼쳐진 시간 앞에서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과거로 침잠 한다. 과거에 대한 원망과 분노에 사로잡혔던 어느 겨울밤, 과거의 한 사건을 떠올리고 그날 이후로 그녀의 삶은 달라진다.


‘가족’의 굴레에 갇혀 있는 이모의 삶은 통속적으로 보일 수 있다. 가부장적인 가족 안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희생을 강요당하는 소재는 한국 소설에서는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진부한 소재를 새롭게 보게 만드는 몇 가지 장치가 존재한다. 그중 하나는 소설속 사건에 대한 묘사의 방식이다. 

이 소설은 화자가 이모에게 들은 과거의 사건을 후에 설명하는 방식으로 서술되는데, 그에 따라 화자가 겪은 현재의 사건과 이모의 기억에 따르는 과거의 사건이 교차하며 설명된다. 현재는 단조로운 반면, 기억에 의해 회상하는 과거의 사건과 사건 속 인물에 대한 묘사는 아주 섬세하고 속도감 있게 그려져 있어 눈에 보일 듯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렇듯 현재와 대비되는 과거의 묘사 방식으로 인해 독자들로 하여금 과거의 사건에 대해 더욱 집중하게 한다.  그리고 이모의 삶의 방향을 바꾸게 한 젊은 시절의 사건에 대한 기억이 끌어올려지는 과정은 독자들에게 매우 강렬하며 비일상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공원에서 만난 노숙자의 손바닥과 그 손바닥에 고인 어둠, 그리고 눈물이 고인 그의 탁한 눈빛에서 느낀 기이한 섬뜩함(P91)”을 시작으로, “혀끝에 뜨겁고 얇은 쇳조각이 달라붙은 지독한 통증과 함께 그녀는 전생처럼 오래 전으로 느껴지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P103)”. 고통이 견인한 그녀의 기억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신을 향한 제의의 포즈처럼 두 손을 그녀에게 향한 한 남자에게, 알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힌 그녀는 그의 왼손 손바닥 한가운데에 피우던 담배를 눌러 껐다. 그의 얼굴에 나타난 놀람과 경련, 그리고 서서히 펴지던 표정과 한쪽 눈에서 흘러내리던 눈물을 남김없이 기억하게 된 그녀는 경악에 사로잡힌다(P104).”  

그녀는 이 기억 속에서 그 남자의 모습에 비추어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것 같다. 가족 내의 권력관계 속에서 늘 욕구를 거부당한 피해자로 존재했다고 생각했던 그녀도 남녀관계 속의 권력자로써 냉혹하게 거절하는 가해자의 위치에 서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데, 그녀가 그 동안 살아온 삶과 마찬가지로 “뚫고 들어올 그 무엇도 거부하는 눈동자처럼 까맣고 견고하게 얼어붙은 밤하늘”을 보고, “그녀의 손바닥 가장 깊은 곳에 담뱃불을 눌러 껐다(P105).”  노트에 ‘나는’이라는 말도 쓸 수 없을 만큼 내가 없는 삶을 살았던 그녀는 담배불을 자신의 손바닥에 눌러 끄는 행동을 통해 그동안의 삶의 방식을 거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나를 살게 한 그 고약한 게” 무엇인지를 삶의 ‘화두’로 잡고 마치 수도승처럼 살아간다. 그런 그녀는 곧 다가올 죽음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단순하게 보면 “가부장적 가족관계 속에서 희생당한 여성”에 대한 통속적인 소설로 읽힐 수 있다. 또한 그 희생당한 여성이 불치의 병에 걸려 겨우 얻은 자유마저 얼마 누리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결말을 보면 더욱 그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게 단편적이지 않다. 인간이 삶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부분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는 그날밤 이후 그녀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졌는지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녀는 그 날 이후 자신이 선택한 삶을 충실히 살아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네가 좋은 생각으로 사온건 안다. 하지만 나는 내 가난에 익숙하고 그게 싫지 않다. 우리 서로 만나는 동안만은 공평하고 정직해 지도록 하자”(P86). 세속적인 가치 보다는 자신이 선택한 삶을 성실하게 살아 나갔던 그녀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또한 시한부 선고를 받은 뒤 화자를 집으로 초대하여 과거의 자신의 잘못을 반복해서 이야기 하는 모습은 마치 마지막 고해성사를 하는 신자처럼 보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삶의 태도와 함께 죽음 앞에 당도한 그녀의 평화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독자들은 소설 속 ‘이모’를 통해서 어쩌면 ‘진정한 용서’와  ‘삶에 대한 가치’를 발견 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진부한 소재를 이용하여서 새로운 소설을 만들어 낸 작가의 능력이 돋보이는 소설로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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