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숙제를 하다가 갑자기 영어가 어렵다며 투덜대는 딸내미가 왜 한글이 세계 공용어가 아닌지, 정 어렵다면 반대로 영어를 우리가 공용어로 도입하면 안 되는지 등 참신한 아이디어를 마구마구 쏟아낸다. 영어가 공용어가 되면 스페인어나 중국어를 배울 것이고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을 하소연을 하고 있을 거라는 충고를 하고 싶었지만 네 아빠도 영어 스트레스에 여전히 시달리는 사람 중 하나기에 진심을 담은 깊은 공감의 눈빛만을 보내주었다. 사실 미국 쪽 엔지니어들과 농담 삼아 우리들은 어렸을 때 죽어라 영어 공부할 시간에 너희들은 뭐 하고 있었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냐?라고 푸념했더니 그냥 웃으면서 반쯤 수긍해 주기도 했다. 자기들은 스페인어나 프랑스어를 제2외국어로 공부한다며시간 낭비했다고 하소연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전혀 위로는 안되었다.
아무튼 여기까지는 참신했다. 그러던 중 딸내미는 한 마디 더 툭 내뱉는다. 아라비아 숫자는 세계 공통어잖아! 그건 언어와 국적 상관없이 똑같이 쓰잖아. 숫자로는 대화가 안 되나? 아.... 참신함을 넘어서 실현 가능성까지는 어렵더라도 개념은 획기적인 듯하다. 뭐랄까, 이미 지구 인류가 공통의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례를 찾아냈으니까. 언어가 문화와 국경의 테두리 안에서 한정적으로 사용된다면 1, 2, 3이라는 숫자는 국경과 문화와 정치를초월했다. 행여나 우리가 외계인과 조우한다면 0 ~ 9 숫자 체계는 우리가 이해하는 표현 방식이고 지구인으로서 공동체 의식을 가질 수 있는 증거 중 하나이기에 충분할 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류의 수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주기 위해 소수(素數)를 표현하겠다는 어느 수학자 집단의 가상의 제안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인류 공동체 의식을 대변할 만한 언어는 음악으로 이어진다. 음악기호도 충분히 그렇게 인정될 수 있는 표기의 한 방법론이다.7 음계로 대표하는 서양음악과 달리 우리의 5 음계 등 소리를 표현하는 전통 방식이 여전히 무수히 많지만 지구인을 대표하는 공통의 표현 체계 중 하나로서 음악 기호도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미지와의 조우(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에서 음악감독 존 윌리암스의 5음(레, 미, 도, 낮은 도, 솔)은 왜 그리도 짜릿했는지 무려 40 년도 더 지난 정말 오래된 영화였고 많은 장면들이 기억에는 없지만 강렬한 음악 소리는 여전히 마음속에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다.외계인과의 대화 수단이 음악이라는 것은 어쩌면 이러한 철학적 깊은 고뇌를 거쳐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인간의 본능에 충실한 수단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어쩌다 영어 투덜 얘기에서 지구 공동체로 넘어갔는지. 내가 오선지 위에 음악 기호를 쓰면 서양 악기를 다루는 세상 사람은 같은 음을 눌러야 한다. 그렇게 하기로 약속한 것이니까. 그래서 지금 나는 외국어에 비견할 세계 공용의 언어를 배우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기쁘고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