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의 도구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 난 장인이 아니다.
주제 1: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 유튜브를 뒤적이다 보면 길거리 피아노 연주 동영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혼신의 힘을 다해 미친 듯이 두들기는 연주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마력의 연주자는 인싸처럼 보여서는 안 되고 절대 남들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함을 유지해야 함은 필수이다. 자랑하고 눈길을 잡아끄는 데는 조용하고 느린 곡보다는 빠르고 귀에 익은 인기 있는 곡 만한 게 없다. 목적은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도록 관심을 끌어야만 하는 것이니까. 출중한 실력이 부럽기도 하면서 그게 웅장한 콘서트홀에 놓인 스타인웨이도 아닌 발로 차면 쓰러질 것 같은 허름한 업라이트 피아노이기에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라는 가르침이 스쳐 지나간다. 길거리 업라이트에서 그런 실력을 뽐낼 정도라면 도구를 바꾸면 더 훌륭하고 감동적인 연주도 충분하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연습이 잘 안 되고 들리는 소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누구라도 붙잡고 남 탓을 해보고 싶은데 악보는 죄가 없으니 남는 건 연주자인 나와 피아노밖에 없다. 연주자는 일단 뒤로 미루고 피아노에게 슬그머니 문제를 떠 넘겨본다. 디지털이라 그런지 건반 터치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마음에 드는 음색이 없어요, 건반 재질이 미끄러운 것 같아요, 그때 좀 더 좋은 그 고급진 모델을 샀어야 하는데 너무 속상해요. 하지만 남 탓이 길어질수록 손가락질할 때 남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하나지만 나머지 네 손가락은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래저래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악기 탓으로 돌리는 것은 실력에 반비례하는 듯하다. 말 없는 피아노는 늘 그대로 있었고 나를 거울처럼 반사시키는 존재인 것을 나이가 들고 철이 들어가면서 알게 되었다.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는 얘기는 결국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고 연습에 게으른 질책을 에둘러 표현하는 게 아니겠는가?
주제 2 :장인은 도구를 가린다. 사실 시대가 점점 그렇잖아. 디지털카메라, 휴대폰 등등. 장인이 아님에도 장인인 듯 탄성을 지르게 하는 멋진 작품들 뒤에는 업그레이드 버전 150쯤 되는 색감 자동 보정, 야간모드 등 이름도 어려운 많은 기능들이 떠받쳐 주고 있기도 하다. 일반인들은 그 기능의 10%밖에 쓰지 않고 쓰지 않는 90%의 기능 때문에 가격은 올라간다. 물론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고 아무리 배경이 좋아도 어떤 오브제를, 어떤 구도와 각도로, 어떤 시간에, 어떤 연출을 더해서 찍겠다는 건 다분히 '인간'의 몫이라 할 수 있다. 여기까지도 전문가들이라면 순위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재야의 고수들이 너무 많기에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건 '도구'가 되지 않겠는가?
굴드의 전속 조율사였던 에드퀴스트는 매우 훌륭한 스타인웨이 피아노들을 만나는 사람이었지만 CD 318로 화음 몇 개를 쳐보고는 관심이 확 끌렸다. 훌륭한 악기들의 다양한 특질에 익숙했음에도, 318의 톤과 깃털처럼 가볍고 빠르게 반복되는 액션은 유난히 도드라졌다. 이것은 영혼이 있는 피아노였다. [굴드의 피아노, 케이티 해프너 지음, 글항아리]
글렌 굴드는 피아노 '장인'이다. 수 백대, 수년간 자신의 소리를 찾아 헤매다 발견한 스타인웨이 CD 318. 작품 하나를 연주하기 위해 영혼을 던진 초집중의 상황에서 어느 음색 하나에서 원하는 색깔이 나오지 않는다면 피아노 연주자에게 그것처럼 절망적인 상황은 없을 것 같다.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이다. 세상에나! 숨은 쉬고 사는 건가? 누군가는 그를 편집증 환자라고 한다 해도 그런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일 것 같다. 글렌이 찾는 소리는 스타인웨이가 일부러 그런 소리를 만들려 해도 할 수 없는 부분이기에 장인과 도구의 만남에는 약간의 운명적인 연결이 필요하기도 한 것 같다. 그래서 장인은 도구를 가린다. 도구가 장인을 찾아간다는 표현이 더 괜찮아 보인다.
장인이 도구를 가리든지 가리지 않든지 중요한 건 난 장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도 장인 흉내는 내보고 싶다.
사진: 굴드의 피아노 (굴드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