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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맘 Apr 28. 2019

다섯 살 딸은 가졌는데 서른두 살 엄마는 잃어버린 것.

나에게도 엄마가 있었다.

다섯 살 난 나의 딸은 요즘 세상 모든 일이 만만해 보인다는 특징이 있다. 아빠, 엄마, 오빠가 무언가 시도하다 잘 안 되는 것 같다 싶으면 “그거 나한테 좀 줘봐.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아.”며 가쁜 호흡으로도 야심 차게 덤벼든다. 어른인 우리도, 자기보다 세 살이 많은 오빠도 해내지 못한 일이니 당연히 다섯 살 막내가 해낼 확률은 극히 낮다. 하지만 아이는 정말 매번 자기가 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더 신기한 건 해내지 못했을 때 받는 타격이 거의 없다. 아주 가끔은 본인만 잘 안 되는 일 때문에 울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저 “어? 안되네? 내가 아직 어려서 그런가 봐.” 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금방 다른 관심사로 돌아선다. 


서른두 살 난 나는 요즘 세상 모든 일이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으로 보인다는 특징이 있다. 소수이긴 하지만 믿고 의지하는 지인들이 “한 번 해봐. 너 잘할 것 같아.”라고 아무리 말해줘도 “글쎄…… 잘 모르겠어.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며 한걸음 뒤로 빼기부터 한다. 세상사 요지경, 언제 누구에게 어떤 기회가 올 지 모르는 게 지금 내가 사는 세상 이건만 아무도 함부로 점칠 수 없을 성공의 확률을 나는 극히 낮추어 보기만 한다. 나는 정말 매번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의심부터 하고 본다. 


나도 어린 시절엔 당연히 아니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게 만만해 보일 수 없었다. 맘만 먹으면 공부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꿈꾸는 모든 일이 당연히 이뤄지리라 믿었다. 나는 특별하니까. 그리고 노력도 할 줄 아니까. 그런데 이젠 안다. 내가 바라보고 꿈꾸던 성공의 롤모델들은 분명히 나보단 더 특별한 사람들이거나 나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란 걸. 그러니 자꾸 움츠러든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 나의 위치를 더 솔직하게 깨달을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단 할 수 없는 일들만 자꾸 늘어간다. 


어젯밤 나에게 물었다. 모든 제약이 사라진다면? 돈, 시간, 능력, 관계, 가능성 등 모든 조건과 제약이 사라지고 정말 뭐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인생이 내게 주어진다면 지금 당장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사실 나는 이런 류의 질문을 어릴 때부터 참 좋아했다. 꿈꾸고 공상하기를 즐겼고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는 일은 내게 희망과 설렘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겐, 저 질문조차 결코 쉽게 가슴 깊숙한 곳까지 와 닿질 못한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힘들어보기도 전에 그냥 질문 조차 받아들이질 못하는 것이다.  




“오빠 오빠. 그거 나한테 줘봐.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침 식탁에 앉은 아이가 제 오빠를 향해 무심코 외친 이 말에 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아이가 용감하게 덤빌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작은 성공의 경험들이 쌓여 생겨난 자신감,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가 지금 실패한다 해도 내 인생에 어떤 해악이 없으리란 믿음에서 오는 안전감이다.


 아이가 가진 자신감의 배경엔 대단한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때가 되면 뒤집었고 기었고 걸었다. 옹알이를 하다 말을 했고 하나 둘 수를 세었다. 의자 위에 올라가 키에 닿지 않는 물건들을 꺼냈고 높은 곳에 오르고 뛰어내렸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이 ‘해냈다’는 사실에만 집중하지 결코 그 일의 가치를 함부로 재지 않는다. 나는 잰다. 무수히 잰다.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잖아. 아니 어른이면 이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어야지?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갑자기 나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든다. 마음대로 평가하고 깎아내렸던 것에 미안하다. 그저 ‘해냈다’는 사실에만 집중했더라면 내 마음이 훨씬 기쁨으로 충만했을 텐데. 행복할 기회를 내가 빼앗았다. 


아이가 가진 안전감의 배경엔 꾸준함을 믿는 힘과 자신을 돌보아주는 든든한 빽들이 있다. 내가 지금 당장 넘어지고 좀 아파도 누군가 나를 안아주고 도와주리라는 믿음. 그렇기에 내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 사실은 완벽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믿음 말이다. 아이는 종종 내게 말하곤 한다.


“엄마. 처음부터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엄마, 그래도 괜찮잖아요. 우리가 있으니까. 그쵸?” 


그렇다. 이 모든 말들은 사실 내가 아이에게 주었던 말들이다. 아이에게 늘 주는 말들인데도 정작 엄마인 나 스스로에겐 해주지 못한다는 걸 아이도 아는 걸까? 아이는 이렇게 그 모든 말들을 내게도 고스란히 돌려주곤 한다. 




서른두 살 먹은 내가 다섯 살 딸처럼 행동할 수 없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 아이의 투명한 사고방식을 나는 절대로 다시 가질 수 없을 거란 걸 안다. 나는 더 이상 툭하면 엄마품에 달려가 안길 수 있는 진짜 아이가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나 스스로가 엄마란 걸 안다. 내 아이에게도 엄마이지만 나 자신에게도 그 누구보다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줄 엄마란 걸 안다. 나아가 주변 사람들에게도 잠깐씩이나마 그 역할이 되어줄 수 있단 걸 안다. 물리적으로 다 커버린 우리는 더 이상 진짜 엄마품에서 잠들 수 있는 처지는 못되지만 그렇기에 이따금씩 서로에게 엄마가 되어주고 누구나 평생 함께 해야 할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다섯 살 딸과 함께 바닷가 놀이터에서 @New Plymouth, N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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