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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맘 Jul 25. 2019

[행복 육아] 나는 쉬운 것만 잘하잖아.

늘 '한걸음 더'가 아쉽기만 한 당신에게

     

@Christ Church Art Gallery, NZ


어제저녁 아이들과 짬을 내 한글 공부를 했다. 각자 좋아하는 책을 가져와 읽어보자 했더니 신이 나 한 권씩 들고 나왔다. 라군은 [고양이는 재주가 많아]라는 자연 관찰 시리즈 중 한 권을 골랐고 라양은 ABC 알파벳 어쩌고 하는 세계 명작 전집 중 하나를 골라 나왔다. 한글 공부하자는데 자기가 그나마 읽을 줄 아는 영어가 섞인 책을 들고 온 라양의 귀여운 권모술수. (하하;)


라군은 가져온 책의 제목까진 읽기 수월했으나 중간중간 어려운 받침이 나오니 힘들어했다.


어떻게의 [떻]

많은의 [많]

뒷발의 [뒷]


이런 복모음과 받침. 누가 봐도 어려운 게 분명한 글씨들. 나는 애당초 아이에게 과한 건 기대하지 않았기에 느려도 차근차근 하나씩 잘 읽어가는 아이가 오히려 기특했는데, 아이는 자신이 모든 글씨를 잘 읽지 못한다는 사실에 짜증 나고 답답해했다.


지켜보는 우리 가족 모두 라군을 대견해했지만 정작 본인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잣대가 너무 높아 좌절하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익숙한 풍경.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그 누구보다도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가. '너는 이만큼만 해도 참 잘했다고 내가 칭찬하지만, 나 자신은 이만큼만 해선 안돼. 아직은 칭찬할 때가 아냐.' 이런 식으로 말이다.


아이는 중간중간 북받치는 설움을 견뎌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몸을 배배 꼬기 시작하는 걸 다그쳐가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모으도록 도왔다. 처음부터 잘하지 않는 게 당연한데 이렇게 더 많은 걸 잘 하고 있는데 한두 개 못한다고 포기하면 되겠냐고, 포기하지 않고 그래도 꾸준히 연습을 해야 실력이 느는 것 이라며 입바른 소리를 했다. 내 몸이 좋지 않아 평소보다 여유 있는 맘으로 아이에게 처신하질 못했다. 그럼에도 아이는 잘 따라오는 듯했으나 결국엔 얼마 못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는 아이의 마음을 물었다.


“열 개 중에 여덟 개는 잘 해놓고 겨우 두 개 모른다고 우는 거야? 네가 잘한 게 더 많아. 잘한 게 이렇게나 많은데 그렇게 얼마 안되는, 못한 것에만 집중해서 이렇게 속상하기야?”


“........... 쉬운 것만 잘하잖아……. 으앙앙….”


몰랐던 아이의 새로운 속마음이었다. 예전에 아빠와 학교 숙제를 하다가 자기는 뭐든 잘하고 싶다는 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는 아이였는데, 뭔가를 잘 해도 쉬운 것만 잘하는 건 싫다는 거였다.


아.

이건 정말 누가 뭐래도 나한테서 내려간 DNA가 분명타. 우이씨.

…… (내 남편은 이 부분에 있어 심히 반대 지점에 있는 사람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스스로의 강점은 축소시켜 바라보고 약점은 강화시켜 바라보는 습관은 내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난 이게 겸손함을 미덕이라 배워온 한국 사회의 문화 탓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야??? -_-;;; 딱히 겸손함이 강조되는 교육을 받지 않은 아이에게서 나의 습관을 보고 나니 속으로 철렁한다. 물론 완벽한 사람은 없고 어떤 성격이건 장단점이 있어서 활용하기 나름이란 걸 알고 있지만 때로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게 될지도 모를 아이의 면면을 들여다보게 될 때, 엄마로써 가슴 한켠이 시리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다행히 몸도 맘도 여유가 없는 나를 대신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남편이 거들어주었다.


“네가 잘하는 건 쉬운 게 아니야. 혼자 한글 공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지금 이만큼 읽는 것도 정말 어려운 걸 해내는 거야.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쉬운 걸 잘해. 자기가 잘하니까 그게 쉽게 느껴지는 것일 뿐. 그렇네~ 자기가 잘 하니까 쉽게 느껴지는 거네~ 안 그래? 그래서 누구든 자기가 잘하는 건 자기에게 쉬운 거야. 그건 그냥 당연히 그런 거야. 잘하면 어려운 게 아니지. 뭐가 되었건 자기가 잘하면 쉬운 거 아니겠어? 그러니까. 네가 결코 쉬운 것만 잘하는 게 아니란 거야. 알겠어?


.....말하다 보니까 아빠도 뭔가 확 와닿는다? 우리 아들이 인생의 진리를 깨달았구나!


아들!!!

너는 지금 정말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거야.

그걸 잊으면 안 돼!! 꼭 기억해!! 알았지?”





아이는 금세 씨익 웃어 보였다.

           

@Christ Church Art Gallery, NZ



어제저녁. 뉴질랜드 우리 집 풍경.

만 7세 반 라군, 만 4세 반 라양과 함께.

by.라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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