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내지 않을 자유: 상황을 통제하기보단 내 반응을 통제하는 것
한때 핫했던 MBTI. E냐 I냐 다음으로 뜨거운 감자가 되는 게 끝자리가 J냐 P냐, 계획형이냐 즉흥형이냐다.
그런데 나는 '계획형'이라는 말보다 '통제형'이라는 표현을 들었을 때 쾅 하고 더 와닿았다. J의 기본 컨셉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현실을 통제·관리하려는 욕구'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자신을 기준으로 현실을 조정하려는 타입이다.
판단형(J)은 기본적으로 자신과 주변 세계로부터 안정감을 느끼길 원한다. 그 안정감은 자신이 충분히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예측할 수 있고, 자신의 행동에 따라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을 때 형성된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예측할 수 없는, 자신의 노력과 행동으로 원하는 결과를 낼 수 없는 세계는 이들에게 두렵고 불안한 곳이다.그렇기에 판단형은 자신의 일정한 방침에 따라 상황을 통제 내지 관리하기 위해서 계획을 짠다는 논리인데, 계획짜는 게 늘 귀찮았던 J에 가까운 나에게는 이 논리가 훨씬 와닿았다.
나는 사소한 일에도 최적의 루트/최고의 효율/ 최고 가성비를 찾아내려는 욕심에 사로잡힌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효율적으로 동선낭비 없이 흘러가야 마음이 편하다. 내가 의도한 대로 모든 것이 착착 맞물려 돌아갈 때 쾌감을 느끼며, 변수가 생기면 바로 수정하고 다시 최적화루트 탐색을 시도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회사 복지포인트가 갑자기 들어왔다. 그 돈으로 밥을 사먹거나 시시콜콜하게 흘려보내기보단, 조금 더 "의미 있고 유용한" 쓰임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요즘 배터리가 빨리 닳는다며 투정부리던 아내의 휴대폰 배터리를 교체해주고 싶었다. 대충 배터리 교체비용이 10만 원 내외로 적지는 않은 금액이니, '이번 기회에 바꾸자'라는 심산이었다. 처음엔 집 앞 공식 수리점을 떠올렸다. 혹시 몰라 전화를 해보니 예약이 필수였다. 지금 오면 수리가 안 된다는 거였다. "전화 안 했으면 헛걸음할 뻔했네. 후" 그 기세로 이왕 나가는 김에 핸드폰 맡기고 키즈카페도 연계해서 갔다가 장 봐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혜화, 동대문, 종로까지 지도를 돌려가며 최적의 루트를 계산했다.
결국 혜화 쪽에 예약을 잡았다가, 키즈카페 나이 제한을 발견하고 다시 취소. 잘 아는 키즈카페가 있는 수유 쪽으로 예약을 바꾸고, 사설 수리점 후기가 괜찮길래 그대로 진행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허름했고, 아내는 불안해했다. 결정적으로 사설에서 수리하면 보험이 무효화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치만 이미 핸드폰은 맡기고 난 후, 되돌릴 수도 없었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모든 걸 지금 당장 빨리 효율적으로 처리하려다 결국 본질을 놓쳤구나.
냉정히 생각해보면, 최선의 선택은 단순했다. 며칠만 기다려서 아내가 휴가인날 공식 수리점에 예약하고, 여유 있게 다녀오면 됐던 거다. 하지만 나는 기다림이 불편했다. '지금' 해결하고 싶었고, 내가 생각이 떠올랐을때 빠르게 움직여 해치워 버려야 안심이 됐다.
역에 도착해서 올라가는 길, 아내가 문득 나를 보고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만약 휴대폰 안 들고 왔다고 하면 화낼 거야?"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선 "당연히 화낼 것 같은데…여기까지와서 안들고 왔다하면 그럼 지금까지의 이 모든 계획은 뭐가 되는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게 너무 당연하게 느껴졌다.
한 템포 뒤에 뒤통수를 쎄게 맞은 듯한 충격이 찾아왔다. 왜 나는 그 정도 일에도 화가 날 것 같을까?
돌이켜보면, 화는 단순한 짜증이 아니었다. 내가 세운 질서가 깨질 때 느끼는 무력감, 그 무력감을 견디지 못해 다시 주도권을 쥐려는 반응이었다. 화를 내면, 다시 내가 상황의 중심이 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건 통제가 아니라, 사실상 두려움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통제하려는 마음의 끝에는 늘 불안이 있다.
불확실함을 견디지 못해서, 내가 짠 질서가 무너지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 질서를 어긋나게 만들면, 그건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나를 흔드는 일로 느껴졌다.
하지만 진짜 통제는, 상대를 조정하는 게 아니라 내 반응을 선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계획이 틀어졌을 때, 화내지 않을 수 있는가. 변수가 생겼을 때, 그걸 받아들이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가. 내가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 그 불편함을 그냥 견딜 수 있는가.
통제의 궁극적인 형태는, 화내지 않을 자유다.
모든 것을 내 방식대로 맞추려 하지 않아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계획이 틀어져도 괜찮다. 누군가 내 기대와 다르게 행동해도, 그건 나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그저 세상이 원래 그런 것뿐이다.
예측 불가능하고, 때로는 엉망이고, 그럼에도 계속 흘러간다.
나는 여전히 J에 가깝고, 여전히 최적의 루트를 찾고 싶어 한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건 내가 진짜 통제해야 할 건 세상이 아니라,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의 내 마음이라는 것을 조금은 실천해보려한다.